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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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블루레이)

울프팩 2011. 11. 27. 21:32

고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를 리메이크한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2010년)는 남과 북의 대치만큼이나 갈등의 골이 깊은 인물들 간의 대립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작처럼 생존의 문제로 빚어진 갈등이 아니라 가진자와 못가진 자의 욕정과 애증이 얽힌 감정의 대립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제목과 설정만 같을 뿐 리메이크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다르다.
임 감독은 부자와 빈자의 계급적 대립을 다루고 싶었단다.

그러나 1970년대나 80년대와 달리 계급적 갈등구조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 요즘 한국사회에서 계급적 대립을 다루려면 설득력 있는 정교한 이야기전개가 필요하다.
단순히 돈이 많은 부자와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적 계급적 갈등이 극적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보니 무리하게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선과 악의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스테레오 타입이 되고 만다.
특히 도식적이고 작위적으로만 그려진 부자의 모습은 일부러 부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대립적 스토리로 몰아간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임 감독은 결코 부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빨갛게 칠해놓고 분홍색이라고 우긴들 분홍색으로 보일리 만무하다.
1960년대 식모살이라는 고단한 삶의 한 단면과 사회상을 오롯이 짚어냈던 원작의 아우라에 크게 못미치는, 그저 욕정의 살덩이들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꿈틀대는 작품이 돼버렸다.

1080p 풀HD의 2.35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약간 탈색된 색감과 차가운 느낌의 영상이 잘 살아 있다.
DVD와 비교 불허일 만큼 화질이 좋으며 무엇보다 콘트라스트가 뚜렷이 살아 깊이 있는 영상을 보여준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다.
부록으로 감독과 배우들, 감독과 영화평론가 등 2편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고 제작과정, 삭제장면, 캐릭터 해설, NG모음, 뮤직비디오 등이 풍성하게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콧등을 찡그리며 애교있는 웃음을 웃는 전도연의 색기가 살린 영화다. 극중 하녀는 사실상 식모다.
이 영화는 한 여자의 자살로 시작해서 자살로 끝을 맺는다. 강렬한 시작은 원작과 다른데, 임 감독은 "일부러 원작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초반 중심을 제외한 주변부가 흐릿하게 나오는 영상은 HD캠으로 찍었고, 스쿠터 장면부터 35미리 필름을 사용했다. 임 감독은 배경이 된 거리에서 몇 달 살면서 현장 경험으로 하녀를 구상했단다.
노상방뇨하는 주인공 은이(전도연)의 모습이 뜬금없으면서도 황당하다. 도대체 저 장면을 왜 넣었을까 싶었는데, 임 감독은 "엉뚱하면서도 자유스러운 은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넣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상해 보인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피아노를 가르친다. 그를 감안하듯 리메이크작의 부자 훈이(이정재)는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한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17번 템페스트는 쉽게 칠 수 있는 곡이 아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 사회 통념과 도덕의 틀에서 괴로워 하는 반면 리메이크작의 남자는 본능에 충실하고 자유롭다.
이정재와 전도연의 정사 씬은 2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한 번에 촬영.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 '휴식'을 흉내낸 장면.
임 감독은 부자들의 모습을 너무 작위적이고 도식적으로 그렸다. 오디오 감상하는 모습이 정물화처럼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두 모녀의 음모어린 시선이 담긴 이 장면은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를 흉내냈단다.
문소리가 의사로 깜짝 출연.
하녀와 갈등을 빚는 부잣집 부부로 나온 이정재와 서우. 그들의 모습에서 잘 꾸민 행복의 냄새가 난다.
산부인과 의사로 나온 김진아. 그는 60년대 원작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고 김진규의 딸이다.
임 감독은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고스포드 파크'를 참고했다.
집사 격의 하녀로 나온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이 1971년에 만든 '화녀'에 출연했다.
농밀한 에로티시즘이 눈에 띄는 반면 허공을 떠도는 허황된 대사는 흠이다.
거울이 많고 굴절된 계단이 많아 묘한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는 세트.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 많은 불친절한 영화다. 사람이 도깨비불도 아니고 어찌 자연발화될 수 있는가. 임 감독은 하녀의 주머니에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영화만 봐서는 알 길이 없다.
사족같은 엔딩. 그림은 팝아트 화가인 로버트 인디아나의 '마릴린'. 그림 제목처럼 서우는 마릴린 먼로를 흉내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