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치열한 입시 경쟁은 여전하다.
학생은 물론이고 부모와 교사, 학교 모두 시험을 치르는 당일까지 중압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우리 사회에 과도한 입시 경쟁의 폐해에 대해 경종을 울린 사건이 1986년에 일어났다.
그 해 1월 서울사대부중 3학년이었던 여학생이 입시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해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도 꽤 경쟁이 치열했다.
그 학생은 전교 1등이었는데도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유서를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때 학생이 남긴 유서가 신문에 보도되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난 1등 같은 건 싫은데, 난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이 되기는 싫은데, 난 꿈이 있는데, 난 정말 남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지...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엄마, 성적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미워해야 하고 성적 때문에 친구가 친구를 미워해야 하는데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하나님 왜 이렇게 무서운 세상을 만드셨나요. 선생님 왜 우릴 이렇게 무서운 세상에 살게 내버려 두셨나요.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학생의 유서는 글에 머물지 않고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학생이나 선생, 부모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바꿔야 한다는 참교육 운동이 일면서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 결성 움직임으로 번졌다.
또 작가 임정진은 기획 소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펴냈다.
강우석 감독이 만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는 소설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내용은 고교 2학년 때부터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실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강 감독은 다양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다.
친구에게 노트 빌려주는 것조차 꺼리며 성적 올리기에만 급급한 학생들,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 돈 많은 부모덕에 유학으로 도피할 생각을 하는 학생과 생활고에 시달려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 등 여러 군상들이 나온다.
교사들 또한 무조건 성적만 중시하거나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등 다양하게 갈린다.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강 감독은 빈부 격차에 따른 교육 편차, 학교 내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차별과 인성 부재의 입시 위주 교육 현장을 은연중에 꼬집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무조건 무겁게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가발을 쓰고 성인 영화를 보러 가거나 미모의 여선생을 짝사랑하는 등 또래 학생들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 등을 유쾌한 에피소드로 재미있게 풀어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이미연은 이 작품이 첫 영화 출연인 신인이었지만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당시 인기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그 드라마에서 가난한 간호사로 나온 이미연은 의사로 나온 최수종과 힘든 사랑을 하며 청순가련형 스타로 부상했다.
이미연은 이 영화에서도 드라마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청순한 느낌을 잘 살렸다.
당시 여학생들은 내숭 연기라며 질투했는데 실제로 이미연은 이 작품에서 새초롬한 내숭 연기를 너무 잘했다.
이미연은 나중에 드라마와 영화에서 얻은 내숭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남자의 옷깃을 잡고 얼굴을 파묻는 가나 초콜릿 광고로 또 한 번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여성들에게는 여우짓을 한다며 또다시 원성을 샀다.
어쨌거나 극 중 배역의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리는 똑 떨어지는 내숭 연기로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
당시 이 영화를 본 많은 남학생들은 이미연 때문에 극장에 갔을 정도로 열광했다.
사실 이 작품에서는 이미연보다 한국의 브룩 쉴즈로 통하던 최수지가 더 유명한 배우였다.
최수지 역시 '사랑이 꽃피는 나무' 1기에서 의대생으로 나온 최재성과 연인으로 나오며 인기를 끌었으나 이 작품에서는 이미연이 더 빛났다.
덕분에 이미연은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김보성과 함께 백상 영화제 신인 연기상을 탔다.
지금은 유명한 배우가 됐으나 당시에는 무명이던 김보성은 허석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해 코믹한 연기를 잘했다.
역시 신인이었던 김민종은 권투선수를 꿈꾸는 가난한 학생을 연기했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과도하게 힘이 들어갔다.
이밖에 이덕화, 전운, 정혜선, 최주봉, 양택조, 김일우 등 쟁쟁한 배우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이 영화는 산울림의 김창완이 맡은 음악도 좋았다.
특히 김보성과 이미연이 시장에서 데이트를 즐길 때 나오는 '어젯밤 꿈속에', 결말 부분에 흐르는 '마지막 인사' 등의 노래가 좋다.
두 곡 모두 김창완이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렀다.
무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다시 봐도 짠한 영화다.
우리 사회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가 여전히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최근 출시된 DVD 타이틀은 너무 무성의하게 만들어 실망스럽다.
2만 원대를 훌쩍 넘기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부록이 전혀 없고 한글자막 조차 들어있지 않아 화가 날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질이 볼 만하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영상은 DVD 타이틀 치고는 화질이 괜찮다.
디테일은 떨어지지만 잡티나 스크래치 하나 없고 색감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샤프니스를 높이고 디테일을 조금 더 손을 봐서 블루레이로 출시해 주면 좋겠다.
그러면 다시 구입할 생각이 있다.
확실히 그냥 묻히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음향은 돌비 디지털 2.0 채널을 지원한다.
비록 타이틀 구성은 형편없지만 작품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이를 덮어준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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