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의 '인생'(活着, 1994년)은 중국 현대사의 굴곡을 한 사내의 삶을 통해 풀어낸 수작이다.
중국의 유명 작가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푸궤이(거요우, 갈우)라는 사내의 가정을 중심으로 중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질곡을 다뤘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큰 재산을 지녔던 푸궤이의 인생은 중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새옹지마를 떠올리게 한다.
엄청난 물림 재산을 도박으로 다 날려 알거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지만 1940년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며 장개석 군을 몰아낸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 오히려 무산자 신세여서 살아남게 된다.
그의 저택을 차지한 노름꾼은 반동 지주로 몰려 공개 처형당한다.
1960년대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위해 모택동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시기와 1970년대 모택동이 당권파를 견제하고 권력을 다지기 위해 젊은 홍위병들을 앞세워 벌인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푸궤이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새옹지마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맛본다.
하지만 그것은 푸궤이와 그의 아내(공리), 아이들이 원한 삶이 아니다.
푸궤이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고 보기 힘든 삶을 살며 갑자기 불어온 외풍에 휘둘린다.
푸궤이와 그의 가족들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아이러니한 인과관계가 빚어낸 우연이다.
예기치 않았던 우연이 때로는 그와 가족의 목숨을 살리고 때로는 모든 것을 뒤엎는다.
그래서 푸궤이의 삶은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을 만큼 안타깝고 허무하다.
그렇게 장이머우 감독은 사람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불가해한 영역을 블랙코미디처럼 페이소스가 짙게 깔린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렇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다.
오히려 허망하게 뒤집히는 인생사를 보면 무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특히 엔딩 장면에서 인생의 뒤안길로 접어든 푸궤이가 여전히 쪼들리는 삶 속에 남은 식구들과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건사한 것을 행복하게 여겨야 할지, 허망하게 여겨야 할지 복잡한 심경이 된다.
우리네 인생이라고 푸궤이와 크게 다를 것 없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국에서 이 작품은 편안한 영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푸궤이가 겪는 아이러니한 사건들이 국공 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에서 신처럼 떠받드는 모택동 치세기를 관통하며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에피소드로 포장됐지만 누가 봐도 중국의 과오를 되짚은 것들이다.
이는 곧 모택동의 오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중국에서 한동안 상영 금지됐다가 1994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국제적 관심을 받자 뒤늦게 풀렸다.푸궤이를 맡은 갈우는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수긍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앙상한 체구에 불쌍해 보이는 그의 외모가 배역과 너무 잘 어울렸고 회환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표정 연기가 아주 좋았다.
이 작품에서 만큼은 장이머우 감독의 영원한 페르소나인 공리보다 갈우의 연기가 더 빛났다.
새삼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중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사를 기막히게 풀어낸 장이머우 감독의 연출력에 놀라게 되는 작품이다.
'붉은 수수밭' '홍등' '국두' 등 전작들에서 개인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소소한 디테일에 강한 면모를 보인 장이머우 감독이 대륙적 스케일의 서사에도 능하다는 것을 이 작품으로 입증했다.
훗날 '영웅'이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맡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블루레이 타이틀은 국내 출시된 장이머우 감독 박스세트에 포함됐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영상은 화질이 그저 그렇다.
초반과 엔딩 부분에 지글거림이 심하고 윤곽선이 두껍다.
음향은 DTS HD MA 2.0을 지원하며 부록은 전혀 없다.
한글자막에 '먹을 것'을 '먹고 것'으로, '술까지 있나 했네'를 '... 인나 했네'로 표기하는 등 오자가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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