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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이야기(블루레이)

울프팩 2021. 3. 29. 00:01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의 '귀주 이야기'(秋菊打官司, The Story Of Qiu Ju, 1992년)는 '국두' '홍등' '붉은 수수밭' 등 그의 전작들과 결이 다른 작품이다.

중국 시골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통해 중국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진지하고 무거웠던 그의 전작들과 달리 페이소스가 짙게 깔린 블랙코미디 풍이다.

 

천위안빈의 중편 소설 '만가소송'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씁쓸하고 안타까워 마냥 웃고 있을 수만도 없게 만든다.

내용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고 지내는 중국 시골에서 촌장과 아낙(공리)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다.

 

콴시와 미엔쯔

아낙의 남편이 촌장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고환을 걷어차이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남편은 크게 다치지 않아 넘어가려 하지만 속상한 아낙은 사람을 무시한 처사라며 어떻게든 촌장의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

 

하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촌장이 사과하지 않고 버티자 아낙은 공안을 찾아간다.

공안의 중재에도 촌장은 여전히 뻣뻣하다.

 

아낙은 기어코 촌장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상급기관의 공안을 찾아가고 급기야 재판까지 벌인다.

이 와중에 만삭의 아낙이 위급한 상황을 겪으면서 사건은 엉뚱하게 꼬인다.

 

사건이 커지고 꼬이는 것은 중국 사람들 특유의 콴시(關係)와 체면을 중시하는 미엔쯔(面子) 문화 때문이다.

미엔쯔는 우리의 체면에 해당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낯을 세워주고 호기롭게 보이려는 중국인들의 특성이다.

특히 나이가 많거나 공직자인 경우 미엔쯔는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나름 공직 신분인 촌장은 잘잘못을 떠나 미엔쯔 때문에 나이 어린 아낙과 그의 남편에게 좀처럼 사과를 하려 하지 않는다.

촌장으로서 야단도 치고 한 대 때릴 수도 있는 만큼 사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반면 남편이 어떻게든 아낙을 뜯어말리고 넘어가려는 이유는 콴시 때문이다.

콴시는 한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의 끈끈한 관계를 말한다.

 

특히 콴시는 외부인에게 배타적이며 이기적으로 작용한다.

같은 국가, 같은 고향 등 동질감을 형성할 만한 요소가 없으면 중국인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

 

서로 얼굴을 아는 정도를 넘어서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중국에서 사업이나 외교 등 일을 하기 힘들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중국에 가면 콴시 때문에 애를 먹는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이 중국에 가서 권력자들과 관계를 트기 위해 뇌물도 주고 일부러 손해 보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 영화 속에서 남편은 촌장과 관계가 틀어지면 살아가면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내를 말리며 촌장의 눈치를 본다.

 

그래서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은 촌장과 아낙네 가족의 관계가 앞으로 엔딩 이후에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중국에서 대인 관계의 기본인 콴시도 미엔쯔도 모두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의 남아선호 사상도 엿볼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남편이 말다툼 끝에 딸만 넷을 둔 촌장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놀렸기 때문이다.

 

촌장도 아낙이 아들을 낳자 자기를 괴롭혔는데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대단한 일을 했다"며 고개를 숙인다.

되려 촌장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내를 여러 사람 앞에서 대놓고 타박한다.

 

장 감독은 이 모든 것들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대사로 술술 풀어냈다.

정색하고 이런 것들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통해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꼬집었다.

 

특히 우리가 그의 비판과 풍자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시 체면과 관계를 중시하고 과거에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콴시와 미엔쯔를 설명하지 않아도 서양 사람들보다 내용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다큐멘터리 같은 촬영과 실제 주민들의 연기

내용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연기다.

놀랍게도 이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은 공리 등 몇 명을 빼고 대부분 배우가 아니다.


장이머우는 촬영지인 산시성 룽현 시야오허라는 마을에 들어가 시골 사람들을 그대로 출연시켰다.

공리도 촬영 두 달 전에 이 마을에 가서 주민들과 생활하며 친분을 쌓고 농사를 지으며 사투리를 익혔다.

 

톱스타인 공리조차도 이 작품에서는 영락없는 촌부로 변신해 작품 속 시골 마을에 자연스럽게 동화됐다.

분장과 옷차림은 물론이고 어수룩한 촌부의 연기를 어찌나 자연스럽게 잘했는지 절로 감탄하게 만든다.

 

공리는 이 작품에서 선보인 훌륭한 연기로 제4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심지어 장이머우는 도시 풍경을 찍을 때에도 실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몰래카메라처럼 촬영했다.

 

문제는 사전 동의를 받지 않고 영화에 내보내는 바람에 훗날 길거리 장면에 얼굴이 나온 여성에게 소송을 당해 금전 배상을 했다.

이 같은 촬영 덕분에 영상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실감 난다.

 

다만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16미리 카메라로 핸드헬드 촬영을 하다 보니 화질이 썩 좋지 않다.

중국 시골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은 영상 또한 1970년대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과거 우리 모습을 보는 것처럼 익숙하다.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경운기 짐칸이나 손수레에 올라탄 채 달리고 서울에서도 곧잘 봤던 삼륜차가 도심을 누빈다.

길거리 장사들은 주윤발과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영화 속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판매한다.

 

주윤발과 아널드는 1980년대 중국에서도 '영웅본색' '터미네이터' '코만도' 등의 영화를 통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중국적인 음악도 잘 살렸다.

 

영화에 삽입된 곡은 장이머우 감독이 '인생'의 그림자 연극에 사용한 중국 민요 '关中碗碗腔'이다.

한마디로 장이머우의 뛰어난 연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시골 풍경을 잘 담아낸 영상과 음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다만 중국 공안의 행정처리를 사실과 다르게 지나치게 미화한 부분은 옥의 티다.

원래 중국 공안들은 고압적이라고 알려졌는데 이 작품에서는 마치 중국 홍보영화처럼 공안들을 온화하게 묘사했다.

 

황당한 것은 국내에 잘못 소개된 영화 제목이다.

원래 제목인 '秋菊打官司'는 추국이라는 사람이 관에 송사를 했다는 뜻이다.

 

추국은 공리가 연기한 시골 아낙의 이름이다.

추국을 중국어로 치우쥐라고 발음하는데 이를 영어 제목(The Story Of Qiu Ju)에서 Qiu Ju로 표기했다.

 

이 작품이 제4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자 이 소식을 국내에 전한 연합뉴스에서 영어 제목만 보고 '귀주 이야기'로 잘못 보도했다.

연합뉴스를 인용한 다른 언론들도 줄줄이 '귀주 이야기'로 보도해 널리 알렸다.

 

그 바람에 이 영화가 1994년에 뒤늦게 국내 개봉할 때에도 어쩔 수 없이 잘못 알려진 제목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레이 타이틀의 한글 자막 또한 잘못 알려진 '귀주'를 그대로 사용했다.

 

영화 내용만큼이나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다.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장 감독의 박스세트에 포함됐다.

 

1080p 풀 HD의 1.78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영상은 제작 여건상 화질이 좋지 않다.

16미리 카메라로 찍은 장면이 많고 자연조명에 의지하다 보니 지글거림이 심하고 디테일도 떨어진다.

 

윤곽선이 두꺼우며 간혹 필름 손상 흔적인 세로줄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워낙 훌륭한 작품이어서 이 만큼의 화질로나마 볼 수 있는 것이 반가운 작품이다.

 

음향은 DTS HD MA 2.0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은 전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극 중 공리의 시누이로 나온 양류춘은 배우가 아니다. 그는 촬영 후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식당에서 일하다가 결혼했다고 한다.
촬영지는 중국 산시성 룽현 시야오허 마을이다. 영화가 성공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자 중국 지자체에서는 이 동네를 치우지산장(秋菊山庄)이라는 관광지로 개발했다.
공리는 옷을 두껍게 입고 임산부를 연기했다. 원작 소설 및 원래 대본에서는 주인공이 임산부가 아니다. 공리는 촬영지가 몹시 추워 옷을 잔뜩 껴입고 장난을 쳤는데 이를 본 장 감독이 공리 역할을 임산부로 바꿨다.
고추 농사를 짓는 중국 시골 풍경을 잘 담아냈다. 원래 이 영화는 산시성 사투리로 주고받는 대사가 웃겨 폭소가 터진다. 그런데 한글자막에서는 이를 살릴 수가 없어 그 맛을 온전히 느끼기 힘들다. 중국에서도 지역마다 언어차이가 커서 자막을 사용했다. 
경운기 짐칸에 올라탄 사람들이 비포장 신작로를 달리는 풍경은 오래전 우리 농촌같다. 장이머우 감독은 원작 소설을 영화에 맞게 각색했다.
장바닦에 앉아 손으로 고추를 빻아 가루를 만드는 장면. 원작 소설 속 주인공은 밀 농사를 짓는데 영화에서는 고추 농사로 바뀌었다.
길거리 포스터 장사들이 파는 그림 중에 주윤발과 '코만도' 복장을 한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보인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문서에 약한 사람들을 위해 대필해주는 대서꾼은 예전 우리 장터에도 있었다. 장 감독은 배경 마을을 원작 소설의 안후이성에서 산시성으로 바꿨다.
중국의 행정 구역은 촌, 향이나 진, 현, 시 순으로 커진다. 영화 속에서 배경마을은 시고우 촌으로 나온다. 촌에서 일하는 공안들은 주민 관리나 결혼 신고 등 동사무소 일을 겸한다.
중국에서 영화 개봉 당시 관객들은 초반에 공리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공리의 변신이 놀랍다.
원래 장 감독은 공리가 주인공 역할을 하기에 너무 예쁘다고 생각해 다른 배우를 고려했다.
촌장이 공리에게 사과의 의미로 주려고 한 200위안은 꽤 큰 돈이다. 당시 중국의 중간관리자급 공무원 월급이 150위안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재판 광경. 중국 야오닝성 선양 출신인 공리는 어려서부터 예뻐서 지방 TV 방송에 출연했다.
장 감독은 시골 사람들이 카메라에 익숙해지도록 매일 필름 없이 빈 칸메라를 3대씩 돌렸다. 그는 촬영을 할때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촬영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사인을 주지 않아 배우들도 촬영 중인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장 감독과 연인 관계였던 공리는 1996년 싱가포르의 부유한 기어인 황허상과 결혼했다가 2012년 이혼했다. 이후 공리는 2019년 유명한 프랑스의 음악가 장 미셀 자르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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