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오래 연구한 학자인 터프츠대학교의 수전 네이피어 교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다룬 '미야자키 월드'라는 책에서 일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네 가지를 두려워한다고 썼다.
천둥, 불, 지진, 아버지다.
이 중에서 아버지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권위적인 남성 중심 문화를 말한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소다.
그만큼 일본 사람들은 잦은 지진과 여름이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태풍에 시달리며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여기에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도시를 송두리째 태우는 폭격과 원자폭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영화 '10년'(十年, 2018년)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네 가지 공포를 보여주는 영화다.
원래 이 작품은 홍콩, 대만, 태국 등이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2015년 홍콩을 시작으로 각국의 대표적 감독들이 돌아가며 10년 후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는 기획이다.
이를 위해 각국의 감독 여러 명이 각자 생각하는 주제를 15~20분 분량의 단편으로 만들어 취합한 옴니버스 영화로 선보였다.
일본 편에서는 하야카와 치에, 키노시타 유스케, 츠노 메구미, 후지무라 아키오, 이시카와 케이 등 5명의 감독이 참여했다.
이 중에서 여성 감독인 하야카와 치에가 연출한 '플랜75'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발한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나다.
'플랜75'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당면한 고령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작품 속에서 각종 복지비용 등 사회적 부담 때문에 '고령자를 줄이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 일본 정부가 강제로 고령자를 줄이는 정책을 내놓는다.
붙이는 멀미약처럼 귀 옆에 붙이면 고통 없이 잠들어 죽는 약을 원하는 노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평화롭게 죽은 노인들의 장례도 국가가 치러주고 죽기 전에 약간의 위로금도 준다.
과정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 같은 해결 방법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끔찍하다.
특히 영화 속 일본 정부가 겨냥한 대상이 국가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75세 이상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치매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은연중 고령자 해결방법에도 빈부 격차에 따른 경제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더불어 경제적으로 도움되지 않는 사람들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폭력적이다.
정부는 공무원들을 거리로 내몰아 마치 보험판매원처럼 죽기를 희망하는 노인들을 모집하라고 종용한다.
이 또한 가부장적 전통에 기반한 권위적인 일본 정부의 단면이다.
치에 감독은 이 같은 모습을 감정 과잉이나 선동으로 치닫지 않고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렸다.
그렇기에 영화의 내용이 더 충격적이고 무섭게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다.
고통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논의가 이뤄지고 있고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 인정한 존엄사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영화 속 노인들은 고통 없이 죽는다는 점에서 좋아하며 이를 선택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심하게 손을 떨며 무서워한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 장면이어서 크게 공감이 간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훌륭한 작품이다.
키노시타 유스케 감독의 '청개구리 동맹'도 엉뚱한 작품이다.
정부가 머리에 연결되는 장치를 만들어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미래 사회를 다뤘다.
이를 통해 아이들의 생각도 통제하고 교육 내용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장치를 통해 직접적인 고통을 준다.
굳이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을 훈육하거나 체벌할 필요가 없다.
왜 아이들만 통제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어려서부터 이런 통제를 받고 자란다면 성인이 돼서도 정부의 통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부터 국가에 순응하는 국민을 길러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끔찍하다.
어찌 보면 이는 곧 감독이 아베의 장기집권 시기를 보내면서 일본 정부가 과거 군국주의 시절로 돌아간다고 느낀 게 아닐까 싶다.
일본은 오랜 세월 경제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부를 축적한 뒤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의 길을 터놓으려고 시도하는 등 군국주의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의 일본과 다를 바 없다.
유스케 감독도 아베 정부의 모습에서 이런 것들을 느낀 모양이다.
다만 소재는 기발하지만 이를 풀어낸 방법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모든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 있으면서 송전탑의 정전으로 아이들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너무 허술한 설정이다.
마치 심각한 문제를 던져놓고 해결 방법을 모르거나 회피하는 것처럼 보여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츠노 메구미 감독의 '데이터'는 디지털 시대에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소재를 다뤘다.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이 디지털 유산 카드를 통해 어머니의 휴대폰 사진, 메모, 동영상 등 디지털 유품들을 복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과연 어머니의 디지털 유산 속에 아름다운 추억만 들어 있을까.
뜻밖에도 딸은 디지털 유산 속에서 어머니의 외도 가능성을 본다.
그러면서 과연 누구의 딸인지 고민하게 된다.
아버지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
메구미 감독은 이를 역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를 호들갑스럽게 다루지 않고 연애담처럼 차분한 영상과 배우들의 침착한 연기를 통해 보여줘 호감이 간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집중되는 사회인만큼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소재다.
후지무라 아키오 감독의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요즘에 가장 적절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원전 사고 후 방사선에 오염된 지상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올해는 동일본 대지진 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10년째 되는 해다.
10년이 지났지만 일본 사람들은 여전히 방사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가 방사선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보내겠다고 발표하면서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됐다.
이 작품은 이 같은 방사선 공포를 다뤘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특히 지하에 갇혀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비단 방사선뿐만 아니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요즘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아키오 감독은 이를 애니메이션과 결합해 판타지처럼 그렸다.
과연 일본은 미래에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란 물음이 우울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온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아름다운 나라'는 역설적인 작품이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면서 징병제를 다시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케이 감독은 과거의 군국주의 정부로 회귀하는 듯한 요즘 일본의 모습을 미래에 빗대어 은유적인 영상으로 표현했다.
가상현실(VR)을 이용해 전쟁게임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화헌법 폐기를 아이들 장난처럼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더불어 어느 날 자주 보던 청년이 징병을 당해 갑자기 사라지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가 모두의 일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점을 은연중 시시한다.
군 복무가 남성들의 의무가 된 우리 입장에서는 지나친 호들갑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우리가 오랜 세월 정전 상태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전쟁에 대한 공포에 둔감해진 것일 수 있다.
사실상 종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남북한이나 미국 중국 등 한국전쟁 당사자들이 아무도 종전을 선언하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5편의 단편들은 각각의 작품들이 그럴듯한 소재를 다뤄 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작품마다 편차가 크다.
플랜75를 제외하고는 표현 방식이나 구성 등이 치밀하지 못하고 이야기 전개가 늘어져 아쉬움이 남는다.
따라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름만 보고 블루레이 타이틀을 구입하면 실망할 수 있다.
히로카즈 감독이 5명의 감독을 선정했을 뿐 그가 만든 작품이 아니니 낚시질을 당하면 안 된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또는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윤곽선은 깔끔하지만 일본 타이틀 특유의 뿌연 느낌이 있다.
돌비 트루 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영상은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각 채널을 요란하게 울리기보다 배경음악이 시청 공간을 편안하게 감싸는 분위기다.
부록은 예고편과 뮤직 비디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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