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양조위 14

아비정전 (블루레이)

나른하고 후덥지근한 여름, 턴테이블에서 맘보 음악이 바람 불 듯 흘러나오고, 여기 맞춰 청년이 흐느적거리듯 춤을 춘다. 잊을 수 없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1990년)은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엇갈린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은 세기말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불안했던 홍콩 사람들의 심리를 투영한 작품이다. 영상이나 구성이 꽤나 공들여 잘 만든 작품인데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유는 왕가위의 데뷔작이었던 '열혈남아'에 매료된 사람들이 또다시 툭툭 끊어지는 듯한 빠른 몽타주 기법의 액션과 열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봤다가 너무나 긴 호흡의 서정적인 이야기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열혈남..

색계 (블루레이)

세상에는 드러내서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감추고 지켜봐야 하는 사랑이 있으며,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랑도 있다. 이안 감독의 '색계'(Lust, Caution, 2007년)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지독한, 모든 것을 던진 절망적인 사랑이다. 이 작품은 역적을 처단하기 위해 신분을 숨긴 채 잠입한 여자 스파이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미묘하게 흔들리는 이야기다. 그래서 욕망을 뜻하는 '색'(色)과 경계하고 자제할 것을 뜻하는 '계'(戒)가 결합됐다. 이안 감독의 특징은 차분하고 조신하게 감정을 끌어올린다는 것. 마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오르는게 아니라 한계단 한계단 조심스럽게 밟아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피로연' '음식남녀' '와호장룡' 등 그가 만든 작품들을 보면 화선지..

화양연화

왕가위(王家卫) 감독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열혈남아'와 '화양연화'다. '열혈남아'가 그의 패기를 느낄 수 있는 독보적 작품이라면 '화양연화'는 명품처럼 빛나는 걸작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년)는 극장 개봉 당시 지루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영화는 상당히 느리다. 1시간 30분이라는 길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여러 장면이 슬로 모션과 정지 화면에 가까운 클로즈업으로 흘러간다. 왕 감독은 이처럼 느린 영상을 통해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미국의 명가 크라이테리언 DVD를 리핑한 게 아닐까 싶은 국내 출시판은 화질 좋은 프로젝터로 보면 아련한 색감과 곱디고운 필름 입자가 그대로 느껴져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살린다. 여기에 시게루 우메바..

무간도(트릴로지 박스세트)

마이자우후위(麥兆輝)와 리우웨이창(劉偉强)이 공동 감독한 '무간도'(無間道 2002년)는 홍콩 누아르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이다. 뒤를 받쳐주는 작품들이 없는 탓에 1980년대 말의 홍콩 누아르처럼 열풍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홍콩 누아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경찰과 범죄조직 삼합회에 각각 스파이를 심은 양쪽 집단이 끊임없는 두뇌 싸움을 벌이는 이 작품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에 힘입어 홍콩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미국에서는 브래드 피트 등을 기용해 리메이크 작품을 만든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시나리오다. 마이자우후위 감독과 장웬지앙(庄文强)이 함께 쓴 시나리오는 총싸움과 액션에 의존한 기존 홍콩 영화와 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