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유덕화 14

지존무상

1980년대 중후반을 주름잡은 홍콩 느와르는 두 축이 있었다. 바로 액션과 도박이다. 왕정과 향화승이 공동 감독한 '지존무상'(Casino Raiders, 1989년)은 바로 도박류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열혈남아'로 혜성같이 등장한 유덕화가 자기 존재를 확실히 알린 이 작품의 흥행 덕분에 '도신' '도협' '도성' 등 도박시리즈가 줄줄이 탄생했다. 사실 이 작품은 화려한 손놀림 등 도박사들의 기교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로 당시 피끓는 청춘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야기는 더할 수 없이 단순하지만 막판 대결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정작 주연인 알란 탐보다 유덕화가 돋보였고, 진옥련보다 유덕화의 애인으로 등장한 관지림이 눈에 띄였던 작품. 유덕화는 이 작품 히트 이후 ..

연인

장예모 감독의 '연인'(2004년)은 무협물의 탈을 쓴 애정물이다. 비록 외형은 칼과 권법이 난무하는 무술영화지만 내면은 등장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애정비사다. 그런 점에서 '연인'은 그의 전작인 '영웅'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무협영화의 틀을 지녔지만 무술은 주제인 협(俠)과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한 소도구일뿐 본질은 아니다. 특히 '연인'의 경우 이 같은 현상이 더욱 심하다. '영웅'은 무술의 대가인 이연걸이 나와 실감나는 무술 실력을 과시하지만 '연인'은 와이어 액션에 의존하는 판타지에 가까운 무술을 선보인다. 이처럼 장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유달리 사랑에 집착하다보니 더러 '연인'을 무술은 없고 로맨스만 남은 애정극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 같은 비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장 ..

열혈남아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으니 1988년으로 기억한다. 새 학기가 시작돼 대학에 수강신청을 하러 갔다가 고교 후배를 만났다. 점심을 먹으며 영화 얘기를 하던 중 녀석이 갑자기 "죽이는 영화를 봤다"며 입에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녀석 왈, "최근 일본에서 붐이 일어난 작품인데, 국내에서는 지난해 말 변두리 극장에 며칠 걸렸다가 사라졌다"며 "최근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봤는데 극장에서 못 본 게 한이 될 만큼 멋진 작품"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 작품이 바로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As Tears Go By, 1987년)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날 당장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본 작품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시 더블데크가 없어 VTR을 재생하며 TV에 연결된 비디오카메라로 녹화를 뜬 뒤, ..

무간도(트릴로지 박스세트)

마이자우후위(麥兆輝)와 리우웨이창(劉偉强)이 공동 감독한 '무간도'(無間道 2002년)는 홍콩 누아르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이다. 뒤를 받쳐주는 작품들이 없는 탓에 1980년대 말의 홍콩 누아르처럼 열풍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홍콩 누아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경찰과 범죄조직 삼합회에 각각 스파이를 심은 양쪽 집단이 끊임없는 두뇌 싸움을 벌이는 이 작품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에 힘입어 홍콩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미국에서는 브래드 피트 등을 기용해 리메이크 작품을 만든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시나리오다. 마이자우후위 감독과 장웬지앙(庄文强)이 함께 쓴 시나리오는 총싸움과 액션에 의존한 기존 홍콩 영화와 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