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홍상수 24

해변의 여인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황당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기-승-전-결의 체계를 갖추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일반적인 드라마투르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갑자기 시작해서 느닷없이 끝난다. 어느 시점을 사건의 시작 또는 절정, 끝이라고 집어내기 힘들다. 그냥 사람들의 하루를 툭 잘라내서 필름에 집어넣은 것처럼 심상한 삶을 보여준다. 이를 혹자는 '일상의 힘'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심드렁한 일상을 영상으로 붙잡을 수 있는 홍 감독의 특기라고 본다. 그의 일곱번 째 작품 '해변의 여인'(2006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작품 구상을 위해 서해안으로 떠난 감독이 그곳에서 어느 여인과 겪게되는 일상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자면 덧없는 욕망과 자신에 탐닉하는 이기적인 삶이 보..

오! 수정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년)은 사람의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똑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벌이는 미묘한 로맨스를 약간 어수선하게 풀었지만 나름대로 색다른 시도가 좋았다. 이 작품을 보면 홍 감독의 연출이 겉보기에 심드렁해 보여도 의외로 사람의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구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등장인물들의 마음속을 엑스레이로 촬영한 듯한 대사와 그림들을 보며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할리우드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다시 나온 DVD 타이틀은 화질이 개선됐다. 흑백 영화라는 특성상 화질이 개선돼도 큰 차이가 나지..

극장전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매사에 시큰둥하고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나온다.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오 수정' 등 그의 작품들을 보면 배우들은 느닷없이 화를 내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건다. 이를 보는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배우들의 엉뚱한 모습이 마치 관객에게 도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홍 감독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를 영화의 재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의 6번째 작품 '극장전'(2005년)도 마찬가지다. 엉뚱한 인물들의 대화와 상황이 빚어내는 당혹감은 전작들과 마찬가지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만큼 유머러스하지 않다. 더 이상 놀랍거나 신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감독의 이름을 알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은 찌는듯한 한여름 날씨처럼 권태롭고 답답한 소시민의 일상을 다룬 수작이다. 유명하지 못한 소설가 효섭(김의성),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유부녀 보경(이응경), 그런 효섭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민재(조은숙), 묵묵히 민재를 짝사랑하는 민석(양민수) 등 등장인물들은 일과 사랑 어느 것 하나 쉽게 풀지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영화전문기자 오동진은 이 영화를 가리켜 1990년대 들어와 꿈을 잃어버린 1980년대에 20대였던 세대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면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꿈을 접은 1980년대 학번들을 다룬 노래다. 정태춘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