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홍상수 24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블루레이)

2004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언론 시사회 때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느닷없이 끝나는 결말에, 뒷줄에서 황당하다는 듯 웃음이 터졌다. 황당함은 기자간담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 됐다. 여자가 남자의 미래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홍 감독 왈, "제목은 내용과 상관없다. 어느 날 이 문장을 봤는데 끌려서 붙였다. 제목은 문장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이것은 좀 아니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혹독하게 기사로 깠다. 한편으로는, 이전에 본 서너 편의 작품과 동어반복처럼 되풀이 되는 그만의 스타일이 좀 게을러 보이는 측면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 점들이 홍 감독 영화의 단점으로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여러 편 보다보니 그의 개성으로 부각된다. 등장..

밤과 낮 (블루레이)

홍상수 감독의 여덟 번 째 영화 '밤과 낮'(2008년)은 이중성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딱히 이중성을 다룬 영화라고 단정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워낙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다면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우연히 대마초를 얻어 피웠다가 잡힐까봐 파리로 몸을 피한 어느 유부남 화가의 이야기다. 설정부터 범상치 않아 웃음이 나온다. 이 작품은 서로 대립하면서 묘한 긴장관계를 불러 일으키는 이중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우선 서로 댓구를 이루는 제목부터 그렇다. 하루를 구성하는 밤과 낮은 상호보완적이면서 서로 함께할 수 없는 분리적인 요소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성남(김영호)과 아내 성인(황수정)이 있는 서로 다른 장소인 파리와 서울의 시간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공간의 존..

생활의 발견 (블루레이)

강원 춘천의 청평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회전문이 있다. 돌아가는 문이 아니라 큰 흐름이 바뀌는 터닝포인트 같은 문이란 뜻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끝나고 해탈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문이다. 더불어 여기 얽힌 전설도 있다. 당 태종의 딸 평양공주를 사랑했던 청년이 있었으나 평민 주제에 공주를 넘본 죄로 처형당했다. 청년은 죽어 상사뱀이 돼 공주의 몸을 휘감았다. 별의별 방법을 써도 뱀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신라에서 온 중이 청평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라고 일러줬다. 공주가 청평사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는 동안 떨어졌던 뱀은 공주가 나오지 않자 회전문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벼락이 쳐서 죽고 말았다. 공주는 죽은 뱀을 불쌍히 여겨 묻어줬다. 그러나 어찌 보면 뱀에게는 죽음이 곧 질긴 집착의 고통에서 ..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2011년)는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해서 화제가 된 작품이다. 그의 영화 중에 외국인이 주인공으로 나온 작품도 처음이거니와, 프랑스의 유명한 여배우가 주인공을 맡았으니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다. 평소 홍 감독 영화를 좋아한 위페르는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응했고, 저예산 영화라는 점을 알고 매니저나 코디네이터 일체 거느리지 않고 혼자 방한했단다. 영화는 보이지 않게 연결된 서로 다른 3편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배우와 장소만 동일할 뿐 그들이 빚어내는 상황과 이야기는 제각각이다. 다만 등대, 우산, 해변, 안전요원, 텐트, 펜션 등 어떤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얼굴을 내밀며 마치 토막난 꿈처럼 각기 다른 단편이지만 연결성을 암시한다. 홍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우..

북촌방향

이 영화, 참 기이하다. 어디서나 봄직한 일상의 소소함 속에 생각할 거리를 던졌던 게 그동안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라면 그의 12번째 영화인 '북촌방향'(2011년)은 전작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조각그림처럼 흩어진 평이한 삶의 단면들이 같은 점이라면, 뒤틀린 시공간은 다른 점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들다. 선배(김상중)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영화감독(유준상)이 북촌이라는 동네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부대끼는 내용은 언뜻보면 하루 동안 이야기 같으면서 며칠 사이 벌어진 일 같기도 하다. 그만큼 영화 속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보니 시간의 배열도 혼란스러워 인과관계도 분명치 않다. 즉, 귀퉁이가 닳아서 두루뭉실한 퍼즐 조각처럼 어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