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꼬방동네 사람들(블루레이)

울프팩 2023. 1. 23. 18:09

이동철의 동명 소설을 배창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 '꼬방동네 사람들'(1982년)은 1970~80년대 궁핍한 삶을 살았던 도시 빈민들의 이야기를 핍진하게 그려낸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다.

본명이 이철용인 작가 이동철은 빈민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했다.

 

결국 어려서 자란 창녀촌에서 좀도둑질과 펨푸 등 양아치 노릇을 하며 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도시 빈민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런 경험을 살려 자전적 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그의 소설들은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 '바보 선언' 등 여러 편의 영화로 제작됐다.

배 감독도 '어둠의 자식들' 촬영 때 조감독을 하며 이동철을 알게 된 인연으로 그의 원작 소설을 이용해 감독 데뷔작을 만들었다.

 

내용은 빈민촌에서 한 손에 늘 검은 장갑을 끼고 구멍가게로 연명하는 명숙(김보연)과 주변인물들의 사연 많은 삶을 다뤘다.

건달 같은 사내 태섭(김희라)과 살아가는 명숙은 소매치기였던 남편 주석(안성기)이 감옥에 간 뒤 홀로 아들을 키웠다.

 

출소 후 택시 운전을 하는 주석이 명숙을 우연히 만나면서 이들의 삶이 소용돌이친다.

영화는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1970, 80년대 도시 빈민들의 힘든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개척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송재호)부터 기구한 삶을 뒤로 한채 혼자 여러 아이를 키우는 여인, 과거 살인을 저질렀던 신분을 숨긴 채 흘러 들어온 태섭 등 인물들의 삶이 다채롭다.

캐릭터들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연기다.

 

주석을 연기한 젊은 시절의 안성기는 눈빛과 표정이 매섭게 살아 있다.

가난 때문에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린 남자의 독오르고 날 선 눈빛이 섬뜩하다.

 

또 김보연, 김희라, 송재호 등 연기파 배우들은 마치 동네 사람들처럼 자연스럽다.

그만큼 배 감독의 캐스팅이 훌륭했다.

 

특이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 여사의 출연이다.

원작에 없는 역할을 배 감독이 만든 캐릭터인데 단순히 한두 장면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사도 있고 사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등 꽤 비중 있게 나온다.

 

특히 동네잔치 마당에서 보여주는 그의 춤사위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그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주고 위안이 된다.

촬영 당시 배 감독은 첫 작품인 이 영화가 실패하면 영화계를 떠나겠다는 절실한 생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인 감독답게 독창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영화에 사실감을 부여했다.

건물의 틈 사이로 보이는 절묘한 에로티시즘이나 금이 간 거울을 이용한 인물의 정서적 표현 등은 사실적이면서도 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끌어올렸다.

 

덕분에 그는 데뷔작을 통해 사실주의 감독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는 극 중 인물들만큼이나 고난의 찬 과정을 헤쳐 나갔다.

 

군사 독재 정권 시절이라 사전 시나리오 검열은 물론이고 촬영 후 프린트 검열까지 받았다.

그 바람에 시나리오가 수 차례 수정됐고 제목도 바뀌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최대한 당시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지금은 사라진 브리샤 택시와 물지게, 동네 회갑잔치 등 추억 속 풍경은 물론이고 1980년대 서울 거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울러 놀란스의 'Sexy Music' 등 당시 인기를 끌었던 디스코 음악도 들을 수 있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화면비의 블루레이 타이틀은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괜찮은 화질이다.

 

윤곽선의 예리한 맛은 떨어지지만 비교적 복원이 잘 됐다.

일부 장면에서 스크래치와 세로 줄무늬 등 필름 손상 흔적이 간간이 보인다.

 

음향은 DTS HD MA 모노를 지원한다.

부록으로 배 감독과 김성욱 평론가 해설, 이미지 자료 등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배 감독이 초반 동네 공용 화장실 앞에 담배를 물고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 역할로 깜짝 출연했다. 또 극 중 판사의 판결문 낭독도 배 감독이 녹음했다.
이 작품에서 안성기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이 작품은 시나리오 사전 검열에서 여러 번 반려됐고 제목도 '검은 장갑'에서 지금 제목으로 바뀌었다.
판소리 명창으로 병신춤의 대가인 공옥진 여사가 깜짝 출연. 그는 2012년 고인이 됐다.
주인공 명숙을 연기한 김보연은 철길 따라 울며 떠나는 장면에서 흐르는 주제가를 직접 불렀다. 원래 노래를 잘한 그는 1978년 음반을 내고 '사춘기'라는 노래를 히트시켰다.
배 감독은 자연스러운 줌과 벽돌 담 틈 사이로 훔쳐보는 듯한 앵글을 통해 절묘한 에로티시즘을 연출했다.
배 감독은 공옥진의 공연과 방송을 보고 색다른 캐스팅이 될 것 같아 섭외했다.
출소자에게 두부를 먹이는 풍습은 널리 알려졌지만 생계란을 깨뜨리고 두부를 먹이는 것은 처음 알려졌다. 이는 원작자 이철용이 배 감독에게 알려줬다.
배 감독은 남대문이 서울의 상징이어서 영화에 배경으로 넣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대한상의와 신한은행 등이 들어선 자리에 낮은 건물들이 보인다.
음악은 배 감독이 '어둠의 자식들'을 작업하며 알게 된 김영동이 맡았다.
촬영은 현재 경기 광명시로 편입된 철산동에서 현지 촬영했다. 당시 조명 발전기와 강우기 소리 등이 너무 시끄러워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공옥진의 등 뒤로 물지게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만큼 당시 수도 시설이 열악했다.
김희라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놀란스의 'Sexy Music'에 맞춰 춤 추는 장면이 우스꽝스럽다. 배 감독은 원작자가 살던 동네에 자주 가서 도시 빈민들의 삶을 관찰했다.
김형자가 동네 알코올 중독 여인으로 등장. 당시 시나리오 심의관들은 다섯 차례나 시나리오를 반려하면서 60군데 이상 고치라고 요구했다. 부부 싸움할 때 머리채를 잡지 말고 방에 요강을 두지 말라는 것도 수정 요구 내용에 들어 있었다.
2020년 세상을 뜬 송재호가 연기한 개척 교회 목사는 허병섭 목사를 모델로 했다. 2012년 사망한 허 목사는 1970년대 서울 하월곡동 빈민촌에 빈민교회를 세워 '하월곡동의 예수'로 불렸다. 그는 막노동을 하며 빈민들을 돕기 위해 애를 썼다.
주인공 명숙은 아이가 끓는 물에 데일 뻔한 것을 막으려다가 손에 화상을 입은 뒤 항상 검은 장갑을 끼게 된 사연을 갖고 있다. 배 감독은 이 작품으로 1983년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김보연과 김희라도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각각 수상했다.
소매치기를 하다가 출소하고 택시운전사가 된 주석은 브리샤 택시를 몬다. 1970, 80년대는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렸다. 출퇴근 버스에서 면도칼을 이용해 남성들의 양복 안주머니를 터는 안창따기, 여성들의 핸드백을 째고 지갑을 터는 일들이 흔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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