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그 해 여름 VS 국경의 남쪽

울프팩 2007. 3. 3. 14:40
이데올로기는 참으로 무섭다.
휴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소리없이 파고들어 사람을, 세상을 같은 색깔로 물들인다.
특히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을 바꿔놓는 힘을 지녔기에 아찔한 공포를 느낀다.

'그 해 여름'과 '국경의 남쪽'은 바로 극한의 좌우 이념대립으로 분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다.
두 작품 모두 역사의 질곡으로 개인의 삶이 물에 젖은 휴지처럼 풀어져버리는 공포스런 이야기를 담았다.

조근식 감독의 '그 해 여름'은 과거 1980년대 한창 일었던 학생운동을 떠올리게 만든다.
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당시 좌익분자로 몰리면 한 순간에 삶이 고통으로 변했다.

농활을 떠난 대학생 석영(이병헌)은 시골 처녀 정인(수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정인의 아버지는 월북한 좌익 사상가였다.
두 사람은 이에 상관없이 사랑을 키우지만, 석영이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정인의 배경이 졸지에 두 사람을 옭아매는 굴레가 된다.

영화는 이념 앞에서 무참히 깨져버리는 두 사람의 인생을 긴 호흡으로 담아간다.
그러나 막판 갈등이 불거지기까지 과정을 신파조로 너무 유장하게 풀어가다보니 절정에 이르기전에 맥이 빠져버린다.

좋은 주제와 훌륭한 배우들을 캐스팅하고도 이야기를 힘있게 맵시나게 끌어가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조 감독은 전작인 '품행제로'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다.
두 작품 모두 70,80년대의 옛추억을 소재로 삼은 점을 보면 과거에 대한 조 감독의 향수가 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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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판석 감독의 '국경의 남쪽'을 보는 내내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이 답답했다.

탈북 청년 선호(차승원)는 결혼 약속을 한 애인 연화(조이진)를 북에 두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온다.
애인을 데려오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사기까지 당하며 실패한다.
결국 어렵게 만난 서울 여자 경주(심혜진)와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는데, 하필 애인 연화가 탈북을 해서 서울로 찾아온다.
이때부터 선호와 연화의 엇갈린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코 분단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빚어지지 않을 가슴아픈 사랑이다.
영화는 이를 깔끔한 구성과 정제된 대사로 잘 풀어냈다.
특히 선호의 "인생은 알 수 없는 음표로 가득차서, 그저 더듬더듬 연주할 뿐"이라는 시 같은 대사나, 결혼한 선호를 붙잡고 "첩으로라도 살겠다"는 여인의 절절한 대사가 가슴을 친다.

애잔한 선율의 음악도 좋았고 유장하게 이어지는 영상도 훌륭했다.
다만 주제의 지나친 무거움이 너무 가슴을 내리 누른다.

'그 해 여름'과 '국경의 남쪽' 모두 보고나면 지나칠 정도로 답답한 작품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보고 듣기만 해도 그 정도인데, 실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다.
참으로 한 많은 세상, 한 많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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