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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더 스파이(블루레이)

울프팩 2021. 9. 6. 00:28

1962년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0년대 발생한 가장 심각한 사건이었다.

냉전 시대 핵 위기의 상징 같은 이 사건은 구 소련이 미국의 코 앞인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서 비롯됐다.

 

본토 전역이 핵 미사일의 사정거리에 놓이는 미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해상 봉쇄에 들어가면서 자칫 잘못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뻔한 일촉즉발의 위기를 야기했다.

결국 소련은 핵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함대를 되돌려 전쟁의 위기를 모면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소련 정상이 핫 라인을 개통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당시 언론들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수 싸움이 얽힌 양측의 외교전을 강조했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기록을 보면 당시에는 공개할 수 없었던 치열한 첩보전이 숨어 있다.

도미닉 쿡(Dominic Cooke) 감독의 '더 스파이'(The Courier, 2020년)는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를 둘러싼 첩보전을 다룬 영화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은 당시 소련의 군사정보국(GRU) 소속 올레크 펜콥스키 대령과 영국의 무역상 그레빌 윈의 숨 막히는 첩보 행각을 보여준다.

펜콥스키 대령은 무려 5,000페이지에 이르는 구 소련의 핵 미사일 관련 핵심 정보를 그레빌 윈을 통해 영국과 미국에 전달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소련의 핵 미사일 쿠바 배치 계획이었다.

미국은 U-2 정찰기를 띄우고 갖가지 노력을 다했지만 결정적인 정보를 얻지 못했는데 펜콥스키 대령 덕분에 사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펜콥스키 대령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당시 구 소련의 미사일과 핵 억지력이 미국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제보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구 소련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고, 미사일을 실은 함대를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결국 과장해서 말하면 두 남자가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막은 셈이다.

이 영화는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과 달리 요란하고 과장된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인간 병기 같은 첩보원들이 서로 총질을 주고받는 액션 대신 가슴을 졸이는 두 남자의 숨 막히는 심리전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두 남자는 언제 들킬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KGB의 눈을 피해 정보를 주고받는다.

 

액션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피를 말리는 긴장과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을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를 채웠다.

그만큼 영화는 심리적 압박과 긴장감이 대단하다.

 

여기에는 윈 역할의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와 펜콥스키 대령을 맡은 그루지아 출신 배우 메랍 니니트제(Merab Ninidze)의 훌륭한 연기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특히 올레크와 대질 심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일그러지는 컴버배치의 표정 연기는 압권이다.

 

영화의 주된 기둥은 첩보전이지만 한 꺼풀 들어가 보면 스파이로 만나서 깊은 우정으로 발전하는 두 남자의 믿음이 있다.

두 사람이 서로의 가족을 방문해 선물을 주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하며 발레를 보는 장면들을 보면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가장으로서의 공감대가 짙게 배어 나온다.

 

이 영화가 특이한 것은 중요한 정보 전달자 역할의 윈이 결코 첩보원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윈은 소련을 오가는 첩보 행각을 벌이며 중압감에 점점 초췌해 지고 불안하게 변한다.

 

쿡 감독은 이 같은 윈의 변화를 차분하고 안정한 연출로 섬세하게 묘사했다.

돌이켜보면 미국 CIA와 영국 MI6가 윈을 고른 것은 KGB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민간인을 사지로 내 몬 무책임한 처사다.

 

윈과 펜콥스키 대령의 헌신적인 노력과 고초, 그들의 우정을 한 꺼풀 벗겨보면 민간인까지 첩보원으로 동원한 냉전시대의 냉혹한 정치 논리가 숨어 있다.

정작 이 영화를 보며 분노해야 할 지점이 그 부분이다.

 

할 일을 다한 KGB보다 한 가족을 공포에 떨게 만든 무자비한 정치 놀음이 더 무섭고 화가 나는 것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든 되풀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KGB의 치밀한 감시망에 걸려 첩보 행각이 들통났다.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그레빌 윈은 1962년 간첩죄로 8년형을 선고받고 1년 넘게 복역하다가 1964년 영국 정부가 체포한 소련 스파이와 교환하면서 풀려났다.

이후 무역상 일을 계속하던 윈은 1990년 암으로 세상을 떴다.

 

구 소련에서 잘 나가던 실세였던 펜콥스키 대령은 국가반역죄와 간첩죄로 1963년 5월 16일 루비 앙카 감옥에서 처형됐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공로 등을 인정해 총살형을 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쇳물이 끓어오르는 용광로에 떨어뜨려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080p 풀 HD의 2.39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필터링된 차분한 색감이 잘 살아 있고 윤곽선이 깔끔하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괜찮다.

요란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지는 않지만 리어 채널에 깔리는 빗소리 등이 실감 나게 들린다.

 

부록으로 HD 영상의 제작 과정이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노련한 첩보원이 등장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스파이 영화가 주는 긴장감이 충만한 작품이다.
레이첼 브로스나한이 연기한 여성 CIA 요원은 가공의 인물이다. 감독은 오래된 영국의 MI6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CIA를 대비시키기 위해 여성 요원을 선택했다.
영국 노팅험 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사업가 그레빌 윈은 동유럽을 자주 오가며 무역업을 했다.
1919년생 동갑이었던 윈과 펜콥스키 대령은 두터운 인간적 신뢰로 협력하며 5,000쪽 분량의 정보를 빼돌렸다. 펜콥스키를 연기한 니니트제는 '스파이 브릿지'에도 출연했다.
영국 산업기술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받고 소련 무역과학기술대표단 일원으로 영국을 방문한 펜콥스키는 6일 동안 매일 CIA와 MI6 요원들을 몰래 만나 160시간 분량의 정보를 녹음해 전달했다. 
모스크바의 세레메티예보 공항 장면은 영국 덕스포드 왕립전쟁 기념관에서 찍었다. 이 곳에 전시된 실제 영국과 소련을 오간 여객기였던 BEA리버리를 이용했다.
펜콥스키가 제공한 정보 중에 당시 소련이 갖고 있던 미사일 전력의 상당 부분이 과장됐다는 내용이 있다. 그만큼 미국과 소련의 기술 격차가 컸다.
펜콥스키를 오랫동안 의심한 KGB는 사무실 의자에 맹독성 왁스를 발라 쓰러지게 만들었다. KGB는 맹독성 왁스 때문에 심한 피부염에 걸린 펜콥스키가 1주일 입원한 사이 사무실에 비밀 카메라를 설치해 모든 행동을 촬영했다.
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에 설치된 비밀의 방. 도청 및 감청을 차단하기 위한 특수시설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2일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며 강력 대응하겠다는 연설을 했다.
두 남자가 소련 탈출을 모의하는 과정을 발레 장면으로 대비시켜 암시한 구성이 좋았다.
컴버배치는 출연을 위해 체중을 10kg 감량하고 삭발도 했다.
윈과 펜콥스키는 소련이 미국 정보기관에 심어 놓은 간첩 잭 던랩의 밀고로 체포됐다.
엔딩 크레디트 직전에 나오는 실제 윈의 기자회견 모습. 키에프 포병학교를 나와 제2차 세계대전때 장교로 임관해 나치 독일과 싸운 펜콥스키는 소련 과학연구통제위원회 해외국 부국장이 공식 직함이었으나 실제로는 GRU 요원이어서 군사 기밀을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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