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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목격자(블루레이)

울프팩 2021. 12. 5. 16:35

신문방송학과 혹은 언론학부 교재에 오랫동안 언론보도의 영향력으로 소개된 유명한 사례가 있다.

바로 '방관자 효과'로 알려진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다.

 

1964년 3월,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면에 살인사건 기사를 보도했다.

한밤중에 집에 가던 28세 여성 키티 제노비스가 윈스턴 모즐리라는 범인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911을 낳은 '방관자 효과' 보도

당시 NYT는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칼에 찔리는 35분 동안 주변 건물에서 38명이 목격하고도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충격적인 내용의 이 보도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꾼처럼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방관자 효과라는 말을 낳았고, 급기야 미국 정부에서 긴급전화의 효시인 911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모즐리는 1977년 NYT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긴급전화가 등장하게 만드는 등 사회에 기여했다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그런 점에서 NYT의 보도는 분명 사회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NYT의 보도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다른 오보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실을 일부러 바꾼 조작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오보보다 더 심각하다.

 

희대의 사기극 '제노비스 신드롬'

키티 제노비스의 동생 빌 제노비스는 2004년부터 사건의 내막을 추적한 끝에 NYT 보도가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워싱턴포스트가 2016년 6월 30일 빌 제노비스의 추적을 토대로 한 보도에 따르면 처음부터 38명의 목격자는 없었다.

 

사건을 본 2명의 이웃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집에서 뛰어나와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죽어가던 키티를 보살폈다.

결국 사건 발생 50년 뒤에 실체가 드러난 제노비스 신드롬은 언론이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조작한 선정적 기사의 산물이었다.

 

사건 당시 NYT 지면에 38명의 목격자가 들어간 제목을 뽑은 에이엠 로젠탈 편집기자는 왜 38명의 목격자라고 보도했냐는 빌 제노비스의 질문에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답변을 했다.

진실 보도가 생명인 언론의 기본 원칙마저 저버린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그 뒤로 방관자 효과는 언론 오보의 대표적 사례가 돼버렸다.

빌 제노비스와 함께 로젠탈을 인터뷰했던 다큐멘터리 감독 제임스 솔로몬은 2016년 이 사건과 NYT 보도의 전말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목격자'를 개봉했다.

 

범인 모즐리는 물론이고 조작 기사를 만든 로젠탈 기자가 숨진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조규장 감독의 영화 '목격자'(2017년)는 제노비스 신드롬을 연상케 한다.

 

한국판 아파트의 방관자 효과 다룬 영화

밤늦게 귀가한 회사원 상훈(이성민)은 아파트 단지에서 여성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다.

그는 신고하기보다 오히려 범인에게 가족이 해코지를 당할까 봐 숨긴다.

 

경찰들이 목격자를 찾지 못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상훈의 이웃집 여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알고 보니 그 여자 또한 상훈처럼 살인 현장을 본 목격자였다.

 

그때부터 상훈은 증거인멸을 위해 목격자를 찾아 나선 범인과 피 말리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내용은 방관자 효과인 제노비스 신드롬과 흡사하다.

 

조 감독은 여기에 한국 도심형 주거단지의 특징인 아파트 이기주의를 대입했다.

아파트 거주자들은 같은 건물에 모여 살지만 오히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이웃에 관심도 없다.

 

영화 속에서 살인과 실종사건이 연이어 터져도 희생자를 걱정하기보다 집값 하락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부녀회장 등은 집값이 떨어질까 봐 남편이 아내의 실종을 알리는 전단지조차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권력은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경찰은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 빠트리고, 오히려 피해자가 자경단처럼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무력한 상황을 만들고 만다.

 

물론 극적 재미를 위한 과장이지만 최근 경찰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잇따른 사건 때문에 수긍이 간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장을 이탈해 피해자가 다치고 죽게 만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보면 영화 속 내용이 마냥 허구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영화가 다루는 공포와 긴장은 사실적이다.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하다는 개연성 때문에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고 섬뜩하게 와닿는다.

 

특히 범인의 연쇄 살인 행각에 대해 "이유 없어요. 배고프면 밥 먹는 것처럼 사람 죽이는 미친놈들과 우리는 같이 사는 거예요"라는 형사의 대답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다지 인상적인 장면이나 영상이 없어 아쉽다.

숨죽이며 보다가 어느 순간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급박하게 몰아치는 구성은 훌륭하지만 영상에 좀 더 공을 들였더라면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어두운 밤 장면과 실내 장면이 많지만 크게 디테일이 손상되지 않고 색감이 자연스럽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를 간헐적으로 들려준다.

부록으로 감독과 배우들 해설, 제작과정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제작진은 실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고 촬영했다.
영화는 끝까지 최초 희생자인 여성이 왜 죽어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를 제작한 AD406의 차지현 대표는 배우 차태현의 형이다. 단국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차대표는 부친인 차재완 KBS음향감독의 영향으로 학창시절 방송반에서 활동했다. 어머니 최수민은 유명한 성우다.
상훈은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과 눈이 마주친 뒤 끔찍한 공포에 시달린다.
영화는 처음부터 범인의 얼굴을 드러내고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그의 존재가 주는 공포다.
촬영은 '마스터' '아이 캔 스피크' 등을 찍은 유억이 맡았다.
혼자 아파트에 사는 조 감독은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꿈을 꾸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범인을 연기한 곽시양은 촬영을 위해 체중을 13kg 늘렸다.
곽시양은 범인 연기를 위해 2004~2006년 서울과 수도권에서 14명을 죽인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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