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1994년)은 참으로 독특한 영화다.
두 편의 에피소드로 나뉜 이야기는 연결되지 않는 듯하면서도 스쳐지나가는 인물들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노점 카페를 통해 교묘하게 연결되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서로 남남이지만 사회라는 틀 안에서 보이지 않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축소판 같다.
전작인 '아비정전'의 흥행 실패 이후 데뷔작인 '열혈남아' 스타일로 회귀한 이 작품은 '열혈남아'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그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홍콩 반환을 목전에 둔 불안한 홍콩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듯 청춘 군상들의 흔들리는 사랑을 '열혈남아'에서 보여준 스텝 프린팅과 핸드헬드, 형광등 조명, 뮤직비디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딱 떨어지는 음악과 영상의 조합으로 풀어낸다.
그런 점에서 '열혈남아'에 미치지 못하지만 왕가위의 본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때만해도 뜨겁게 요동치는 맥박같던 그의 영상은 '화양연화' '2046' '에로스' 등으로 넘어가면서 호흡이 길어지고 진중하게 가라앉는다.
1080p 풀HD의 1.78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는 기존에 국내 출시된 DVD에 비하면 화질이 월등 개선됐지만 입자가 거칠어 최신작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리어 활용도가 높아 뚜렷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부록은 전무하다.
DVD 타이틀에 실렸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차분한 음성해설이 제외돼 아쉽다.
<블루레이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열혈남아'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스텝 프린팅이 이번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스텝 프린팅은 일정 프레임을 불규칙하게 늘이거나 삭제하는 기법. 예를 들어 1,2,2,4,4,5,7 처럼 프레임을 불규칙하게 편집한 영상은 잔상을 남기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1부 에피소드는 실연당한 형사와 킬러가 된 마약공급책 여인의 이야기를 다뤘다. 형사는 금성무, 금발 염색한 여인은 임청하가 맡았다.
'열혈남아'처럼 형광등 조명과 불안하게 기운 사선구도, 거울에 반사되 여러개로 보이는 영상 등이 쓰였다. 임청하가 나오는 장면은 홍콩의 중경거리에서 찍었다.
두 편의 에피소드로 나뉜 영화는 촬영도 두 사람이 나눠서 했다. 1편 에피소드는 '열혈남아'에서 촬영을 맡은 '무간도' 시리즈의 감독 유위강이 촬영했고 2편 에피소드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했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일정이 바빠서 앞부분을 유위강이 찍었다.
주의깊게 보지않으면 놓치기 쉬운 장면. 가필드 인형을 들고 나오는 여인은 2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왕정문이다. 이런 식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연결고리를 갖는다. 인형 역시 나중에 양조위 집에 등장한다. 양조위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에 스치듯 등장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스튜어디스를 사랑하다 실연당한 경찰과 그를 좋아하는 여인의 이야기다.
이 영화 때문에 홍콩에 갔을 때 소호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혹시 양조위가 살았던 집은 어디인 지 주변 창문들을 열심히 봤던 기억이 난다.
'열혈남아'를 좋아한다면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시장통에서 왕정문이 장을 본 바구니를 양조위가 대신 들어주는 장면은 '열혈남아'에서 장만옥과 유덕화가 연출한 장면과 동일하다.
사물과 대화하는 양조위. 이런 식으로 두번째 에피소드에는 보기 드문 왕가위의 유머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가 '동사서독'을 찍다가 중단됐을 때 촬영을 시작했으나 동사서독보다 먼저 완성됐다. 촬영에 3주, 편집에 5주 등 약 두 달이 걸렸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독특한 스텝프린팅이 쓰였다. 양조위는 아주 느리게 연기를 하고 이를 슬로모션으로 찍은 뒤 정상속도로 재현하면 주인공은 느리게 움직이지만 배경속 인물들은 고속으로 움직이면서 특이한 그림을 만든다.
일본계 대만가수 금성무와 대만의 인기가수 왕정문이 왕가위 영화에 처음 출연했다.
왕가위 감독은 이 작품에서 "인물에 조명을 맞추지 말고, 조명에 인물을 맞출 것"을 고집했다.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 너머로 촬영한 영상은 마치 유화를 보는 것 같다. 굉장히 감성적인 샷이다.
다이아나 워싱턴의 'What a Different a Day Made', 마마스 &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 크랜베리의 'Dreams'를 왕정문이 개사해 부른 '몽중인' 등 왕가위는 음악을 아는 감독답게 영상과 잘 어울리는 훌륭한 삽입곡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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