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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울프팩 2017. 10. 15. 17:11

피렌체 여행을 가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메디치 가문이 200년 동안 끌어모은 2,500여 점의 방대한 예술작품을 소장한 곳이다.


우피치는 집무실이란 뜻의 이탈리아 말이다.

1560년대 토스카나 지역을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 대공이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지었다.

[베키오 궁전에서 내려다본 우피치 미술관. 1993년 테러리스트가 던진 폭탄에 건물 일부가 부서지는 등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복원됐다.]


건물의 설계는 유명한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맡았다.

코시모 1세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메디치 가문의 미술품을 이 곳으로 끌어 모았고, 1737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로도비카가 모든 미술품을 토스카나 공국에 기증하면서 미술관으로 바꿔 놓았다.


미술관 2층은 베키오 다리 2층의 바사리 회랑과 연결돼 있다.

베키오 궁전부터 미술관과 베키오 다리를 지나 피티 궁전까지 이어지는 약 1km에 이르는 회랑은 세계 최대의 초상화 갤러리로 유명하다.

[우피치 미술관 안에서 바라본 바사리 회랑.]


예전에는 일반인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인페르노'에서는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 교수가 이곳을 지나 우피치 미술관을 거쳐 베키오 궁전의 지도의 방으로 달아난다.


우피치 미술관 입구에는 두 개의 커다란 대리석 석상이 있다.

오른편에 서 있는 모자 쓴 석상은 메디치 가문을 융성시켰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전성기를 이끌어 국부로 불리는 코시모 메디치이고, 왼편의 아이와 함께 서 있는 석상은 코시도 메디치의 손자인 로렌조 메디치다.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였던 코시모 메디치의 석상. 우피치 미술관 입구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일 마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로 통칭되는 로렌조 메디치는 정치에는 그다지 수완이 좋지 않았으나 문예 부흥에 탁월한 감각을 지녀 르네상스의 융성기를 가져온 장본인이다.

경쟁 집안이었던 파찌 가문의 암살 사주로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거행되던 부활절 미사 때 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부상만 입었고 동생 줄리아노가 살해됐다.


로렌조는 동생의 사생아였던 아이를 거둬주었는데 이 아이가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됐다.

걸작 콘솔게임 '어쌔신 크리드 2'에 로렌조의 암살 시도 에피소드가 잘 재현됐다.

[위대한 자 로렌조 메디치 석상을 지나면 우피치 미술관 출입구가 나온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교과서에서 익히 봤던 걸작들이 줄줄이 전시돼있다.

우선 메디치 가문 여인의 결혼식을 그린 두 점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야코포 디 카멘티 디엠폴리가 그린 '카테리나와 앙리의 결혼식'은 '위대한 자' 로렌조 메디치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프랑스의 왕 앙리 2세와 결혼하는 장면을 그려 놓았다.

당시 빚이 많았던 프랑스 왕가는 카테리나의 엄청난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식을 거행했다.

[우피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카테리나와 앙리의 결혼식.]


돈을 보고 결혼한 만큼 프랑스 왕가는 카테리나를 대놓고 홀대했다.

앙리 2세는 왕비인 카테리나를 제쳐두고 스무 살이나 나이 많은 미모의 사촌 디안 드 푸아티에를 총애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딘 관용과 인내의 여인이었다.

결국 앙리 2세도 죽을 때 아내의 헌신을 인정해 참회하며 눈을 감았다.

[우피치 미술관의 복도. 천장 또한 예술작품이다. 긴 복도를 따라 각 방마다 드나들며 전시된 그림을 보게 돼 있다.]


카테리나는 남편이 죽은 뒤 검은 옷만 입고 지내 '검은 옷의 왕비'로 불렸으며 세 아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차례로 왕위에 등극시켰다.

남편의 애첩이었던 디안도 용서하고 성을 내줘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도록 보살폈다.


이처럼 카테리나는 성품도 훌륭했지만 오늘날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 널리 퍼진 각종 문화를 전파한 여인이기도 하다.

결혼 때 수많은 이탈리아 요리사를 데려가 샤벳이라는 후식을 프랑스에 알렸고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포크도 가져가 프랑스에 전파했다.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가문 문양. 피렌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 피렌체 궁정의 우아한 실내 무용을 프랑스에 도입해 발레가 퍼지는 계기를 만들었고 프랑스 향수 산업의 발단이 된 제조기술도 이탈리아에서 들여갔다.

같은 화가인 야코포 카멘티가 그린 '마리아 데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 속 주인공은 비운의 마리아 데 메디치다.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결혼한 마리아는 자주 바람을 피워 속을 썩이던 남편이 죽고 나서 아들 루이 13세가 왕이 되자 어린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다지 정치적 수완이 좋지 못해 정적들과 수시로 부닥쳤고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채 추방돼 벨기에의 브뤼셀로 귀양을 갔다.

[야포코 카멘티의 그림 '마리아 데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


우피치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보티첼리의 방이다.

워낙 유명한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 모두 보티첼리의 방에 걸려 있다.


본명이 디 반니 필리페피인 보티첼리는 형제들이 둥그스름한 술통을 닮았다고 해서 작은 술통이라는 뜻의 보티첼리로 불렸다.

처음에는 금세공을 했으나 나중에 그림을 배워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보티첼리의 대표작 '봄'. 봄의 여신 머리 위로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오렌지 나무가 보인다. 그림 속 오른쪽 세 여인은 같은 인물이다. 님프 클로리스가 서풍 제피로스의 바람 덕분에 꽃을 피우는 플로라가 되고 다시 봄의 여신 프리마베라로 거듭나는 과정을 한 장면으로 묘사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보티첼리는 여성을 사실적인 묘사보다 이상적으로 그렸다.

그래서 '비너스의 탄생'이나 '봄'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보면 유난히 팔, 다리나 목이 길고 관절을 희한하게 비튼 채 서 있다.


'봄'과 '비너스의 탄생' 속 여인은 피렌체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렸다.

북미대륙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사촌이었던 시모네타는 22세 때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결핵으로 숨졌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한쪽 다리를 살짝 기울여 몸의 곡선을 드러낸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톤도 도니'(Tondo Doni)도 우피치 미술관에 걸려 있다.

'어린 성 요한과 성 가정'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피렌체의 부자인 도니가 결혼을 기념해 주문했다.


그러나 도니는 그림값을 깎으려 들었고 이에 분개한 미켈란젤로는 거꾸로 두 배로 올려 불렀다.

결국 도니는 원래보다 두 배나 더 주고 그림을 가져갔다.

[미켈란젤로의 '톤도 도니'. 조각을 중시한 그는 이 그림에서 인간의 관절과 근육의 사실적인 움직임을 강조해 그렸다. 비정상적으로 몸을 비튼 여인이 어머니 마리아, 뒤에 노인이 요셉이며, 오른쪽 아래 어린아이가 세례 요한이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색의 화가 티치아노의 걸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색상만으로 그림을 그려 유명하다.


티치아노는 여성 누드를 그려달라는 우르비노의 공작 구이발도 델라 로베레의 아들에게서 부탁을 받고 이 그름을 그렸다.

은밀한 부위를 손으로 살짝 가린 여성의 발치 쪽에 웅크린 개는 지아비에 대한 여성의 충절을 상징한다.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근대 누드화의 시초가 된 작품.]


로마에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카라바조의 작품들도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바쿠스'는 카라바조가 코시모 2세의 결혼을 기념해 그렸다.


이 작품 속 주인공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는 설, 동성애 애인이라는 설 등이다.

[카라바조가 그린 술의 신 '바쿠스'. 살짝 홍조 띤 뺨 등 술이 오른 사람의 얼굴을 기막히게 그렸다.]


당시 그림을 본 사람들은 카라바조 친구였던 화가 민니티를 떠올렸다고 한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바쿠스 아래쪽에 놓인 포도주병에 자세히 보면 카라바조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고 해서 들여다보니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한다.


카라바조가 그린 무시무시한 '메두사'도 이 곳에 전시돼 있다.

메디치 가문이 좋아한 메두사를 소재로 한 이 그림은 독특하게 원형 패널에 그렸다.

[잘린 머리에서 피가 쏟아지는 카라바조의 '메두사'.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이삭의 희생'도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요구에 따라 아브라함이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의 목을 베려는 장면이다.


사실적인 인물 묘사에 치중한 카라바조답게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이탈리아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렸다.

여기에 공포에 질린 이삭의 표정 등 극적인 순간을 잘 살렸고 강렬한 명암대비 효과로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 겁에 질린 이삭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여성판 카라바조로 불리는 화가다.

서양미술사에서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로 꼽히는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여성이 그림을 배울 수 없었으나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그림을 가르치고 해부학 지식도 알려줬다.

특히 오라치오 화실에 드나들던 카라바조를 만나 그의 명암법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무서운 내용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이스라엘 아낙이었던 유딧은 침략자였던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뒤 잠자리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카바라조도 같은 내용의 그림을 그렸으나 그의 그림 속 유딧이 잔뜩 겁을 먹은 채 주저하는 표정이라면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얼굴에 결연한 의지와 분노가 서려 있다. 여기서 당시 남녀의 시각 차이가 엿보인다.]


딸의 대성을 바란 아버지는 친구인 화가 아고스티노타시에게 딸을 맡겼다.

그러나 아고스티노타시는 당시 17세였던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했다.


오라치오는 아고스티노타시를 강간범으로 고발했으나 이 과정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치욕스러운 검사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여자라는 낙인과 함께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아고스티노시는 9개월에 걸친 재판을 받는 동안 처제와 간통을 하고 아내를 죽일 계획을 세우다가 들통났으며 오라치오의 그림까지 훔치려다가 발각됐다.

[우피치 미술관의 트리부나. 영어의 트리뷴에 해당하는 이 방은 독특하게도 8각형이다. 다양한 작품이 벽에 전시돼 있으며 돔 천장 또한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그런데도 아고스티노시는 1년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며 그마저도 오라치오가 돈을 받아 합의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됐다.

이 사건은 아르테미시아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으나 주저앉지 않고 분노를 고스란히 그림에 담았다.


훗날 아르테미시아는 성공해 피렌체 궁정화가가 됐으며 훗날 갈릴레이와 친구가 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아르테미시아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을 우피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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