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HHhH

울프팩 2016. 12. 28. 21:36

1942년 5월 27일, 나치 독일이 점령한 체코의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 공격을 받았다.

체코인 얀 쿠비시와 슬로바키아 사람인 요제프 가브치크의 공격을 받은 그는 그로부터 1주일 뒤인 6월4일 상처 감염 때문에 발생한 패혈증으로 숨졌다.

 

[아버지가 음악가였던 라인하르트는 뛰어난 바이얼린 연주자였고 피아노도 잘 쳤으며 수준급 펜싱선수였다.] 


프라하의 도살자, 금발의 짐승, 독일 제 3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가는 목소리 때문에 염소 등으로 불렸던 하이드리히는 친위대 수장이었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물론이고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총애했던 인물이었다.

덕분에 그는 친위대(SS) 2인자는 물론이고 보안방첩대(SD)를 총괄하며 비밀경찰 게슈타포, 사법경찰 크리포를 통합한 제국보안부 책임자가 됐다.


제국보안부는 사실상 나치 독일에서 나치 주요 인사들을 비롯해 점령 지역내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손에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첩보기관이었다.

특히 그는 친위대 안에 아인자츠그루펜이라는 인종 청소 부대를 만들어 유대인 뿐 아니라 나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했다.

 

[나치 친위대의 인종학살 전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 


나치가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절멸과 재산 몰수 등 주요 정책을 결정한 것도 하이드리히가 아돌프 아이히만과 함께 세운 계획을 토대로 했다.

그만큼 히틀러와 히믈러는 그를 크게 믿었다.


친위대에서는 이를 가리켜 HHhH, 즉 하이드리히는 히믈러의 두뇌(Himmlers Hirn heißt Heydrich)라고 불렀다.

로랑 비네가 쓴 독특한 소설 'HHhH'는 바로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이 책이 독특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다큐멘터리처럼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다루면서도 작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이 함께 기술된 점이다.

비네는 하이드리히 암살을 소설로 다루게 된 배경과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자료 조사를 하고 현장을 방문하는 과정, 그리고 그때 느꼈던 심경을 함께 묘사했다.


그러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억제했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 가공의 대사나 등장인물의 기분을 꾸며 넣는 일을 배제했다.


[요제프 가브치크는 달려오는 하이드리히의 차 앞으로 달려가 영국제 스턴 기관총을 쐈으나 총이 고장나는 바람에 죽이지 못했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아주 꼼꼼하게 암살 사건을 재구성했고 여기에 작가의 취재 과정을 곁들였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느낌이다.


이 같은 구성과 노력 덕분에 비네는 이 책으로 2010년 프랑스 콩쿠르 문학상을 받았다.

더불어 이 책은 우리에게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널리 소개한 영화 '새벽의 7인'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가브치크의 총이 발사되지 않는 것을 본 얀 쿠비시는 조립한 폭탄을 가방에서 꺼내 하이드리히의 차를 향해 던졌다. 폭탄이 생각보다 빨리 터졌으나 하이드리히는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1주일 뒤 숨졌다.]


영화는 비교적 사건을 충실하게 재현했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배신자였던 카렐 추르다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암살 작전을 위해 낙하산으로 함께 투입된 추르다가 부인과 아이를 걱정해 동료들을 밀고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다르다.

미혼이었던 추르다는 모험을 좋아해서 암살 작전에 자원했으며, 당시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다.


[1947년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대원들을 밀고한 혐의로 체코 법정에 선 배신자 카렐 추르다. 결국 사형당했다.]


그러나 죽음과 보상금의 갈림길에 섰던 그는 죽음도 피하고 보상금을 받기 위해 프라하의 게슈타포 본부를 찾아갔다.

그의 밀고로 암살 부대를 도왔던 프라하의 민간인들이 줄줄이 체포됐고 그들을 통해 게슈타포는 쿠비시, 가브치크, 발치크 등이 숨어 있던 성 키릴 & 메소디우스 성당을 알아내 급습했다.


영화에서는 쿠비시와 가브치크가 서로를 끌어 안은 채 머리의 총을 쏴 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이는 영화가 토대로 삼은 앨런 버지스의 소설이 극적으로 미화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쿠비시는 성당 회랑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친위대원들을 상대로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했고, 가브치크와 발치크는 성당 지하실에서 다른 2명의 동료와 함께 총으로 자살했다.


[암살대원들이 친위대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프라하의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


나치 독일은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리디체 마을 학살이다.


이 학살은 어이없게 시작됐다.

한 여공이 병가를 내가 쉬는 사이 공장에 배달된 여공의 남자친구 편지를 공장장이 뜯어보고, 레지스탕스로 오해해 게슈타포에 신고했다.


[나치가 학살한 리디체 주민들.]


사건 해결에 진전을 보지 못하던 게슈타포는 이를 호재로 사용했고, 하이드리히 암살로 광분에 휩싸인 히틀러는 리디체를 지도에서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다.

리디체 마을 주민 가운데 약 500명의 남자들은 총알이 튈까봐 매트리스를 세워 놓은 건물 벽에 5명씩 줄지어 선 채 차례로 학살당했다.


친위대는 나중에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한 줄에 10명씩 세워 살해했다.

주민들은 앞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며 차례를 기다렸고 쓰러진 시체 앞에 서서 죽음을 맞았다.


[친위대 사령관인 히믈러. 하이드리히는 그의 두뇌였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로 끌려 갔고 이 가운데 게르만인으로 교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소수의 아이들만 독일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 입양됐다.

이후 독일은 건물들을 모두 부셔버렸고 폐허 위에 소금까지 뿌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마을에 돌아다니던 개들까지 죽여 버렸다.

이후 지도에서 리디체는 사라졌다.


[친위대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하이드리히와 더불어 반제회의에서 채택된 유대인 절멸계획을 세웠다.]


전세계 사람들은 리디체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을과 거리 이름, 아이들 이름에 리디체를 붙였다.

리디체는 전후 다시 재건됐다.


암살 작전을 도운 민간인들도 대부분 처형되거나 독극물로 자살하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체코는 이 작전 덕분에 전후 전승국의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할 때 탔던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 오픈카.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와 히믈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탄차량을 이용하지 않았고 종종 경호차량 없이 돌아다녔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 내부의 레지스탕스 지도부는 하이드리히의 철저한 탄압 정책 때문에 괴멸된 상태였다.

이를 높게 평가한 히틀러는 하이드리히를 베를린으로 불러 점령지인 프랑스를 맡긴 뒤 골치거리인 레지스탕스를 소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맡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하이드리히가 죽음을 맞으면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제거 작전이 차질을 빚게 됐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체코 뿐 아니라 프랑스로서도 프라하의 영웅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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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진 저
HHhH
로랑 비네 저/이주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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