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한석규 11

구타유발자들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년)은 다분히 연극적인 영화다. 강원도 산골 개울가라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통털어 8명 뿐인 배우들이 지지고 볶는다. 열려 있는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달아날 수 없는 상황은 밀실에서 느끼는 폐쇄공포증같은 긴장감을 유발한다. 영화의 주제가 낯선 곳에서 느끼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다보니 긴장감의 강도가 만만찮다. 내용은 여제자를 유혹하려고 낯선 산골로 들어간 대학 교수가 뜻하지 않게 지역 불량배들을 만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을 그렸다. 여기에 돌발변수처럼 동네 경찰이 끼어들면서 상황은 예기치 못하게 흘러간다. 무엇보다 영화는 습관처럼 때리고 맞는 폭력의 내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때린 사람은 경찰이 되고 맞던 사람은 또 맞는다"는 한석규의 대사는 때리고 맞는 사..

베를린

액션물을 좋아하는 액션 키드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은 한국판 '본' 시리즈를 보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액션이 요란하고, 나쁘게 말하면 할리우드 영화를 닮았다. 북한과 남한, 그리고 아랍계 악당들에게 쫓기는 하정우가 높은 건물을 휙휙 날고, 격투 끝에 달아나는 장면은 영락없이 본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본' 시리즈를 비롯해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007 근작, '미션 임파서블' 등의 액션들이 대부분 잡고 꺾고 비틀며 관절을 공격하는 격투기와 건물과 건물을 건너 뛰며 높은 곳에서 내리 뛰는 야마카시 같은 동작들을 적극 활용한다. 그렇다보니 서로 닮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도 최근 액션물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만 막판 갈대밭 대결 장면은 테렌스 ..

영화 2013.02.09

8월의 크리스마스 (블루레이)

이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명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알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는 죽음을 기다리는 한 남자의 평온한 일상을 그렸다. 그의 일상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아련한 사랑을 한다. 다만 죽음이 예정돼 있다는 것만 다를 뿐. 그래서 그의 일상은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마루에 앉아서 발톱을 깎고, 가족과 수박을 먹으며 마당에 씨를 뱉어내고 연인과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네 일상이 한없는 무게감으로 다가 온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을 이토록 큰 의미 부여와 함께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음란서생 (한정판)

김대우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음란서생'(2006년)은 참으로 재치있는 작품이다. 야설, 동영상, 댓글 등 현대적인 요소들을 사극에 절묘하게 대입한 솜씨가 일품이다. 무엇보다 김탁환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정교하게 구성한 드라마가 돋보인다. 또 감칠맛나는 대사도 매력적이다. 꽤나 문학적으로 표현한 대사들을 보면 김 감독은 소설을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사대부 집안의 관리가 우연히 음란소설을 접하면서 졸지에 야설 작가로 변신하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 관리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왕의 여인인 후궁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아슬아슬하게 전개된다. 어찌보면 감독은 음란이라는 주제를 통해 금기시된 모든 것들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기도 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버젓이 드러낼 수 없는 음란..

미스터 주부퀴즈왕

신인감독 유선동의 데뷔작인 '미스터 주부퀴즈왕'(2005년)은 제목이 말해주듯 6년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가사 일을 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남자가 집에 있으면 논다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영화는 이 또한 당당한 취업이기 때문에 주부라고 주장한다. 실업자가 줄지않고 조기 퇴직하는 사람이 많은 시점에 세태를 적절히 반영하는 소재를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용두사미라고 했던가, 재치있고 설득력있게 풀어가던 이야기는 후반부에 가서 힘을 잃는다. 특히 한석규와 신은경이 3주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랑타령으로 빠지는 대목은 너무 작위적이다. 골 문앞까지 공을 잘 몰고가서 문전처리를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공을 날려버려 허탈하게 만드는 축구를 보는 것 같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