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히틀러 11

몰락 - 히틀러와 제 3 제국의 종말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도 유럽에서 나치는 금기시된 단어다. 오죽하면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아직도 금하고 있다. 하물며 독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직도 원죄 의식을 갖고 있는 탓에 나치 독일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그들의 시각에서 다룬 제 2 차 대전 관련 영화가 드물다. 볼프강 피터젠 감독의 '특전 유보트'가 주목을 받았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이 만든 '몰락-히틀러와 제 3 제국의 종말'(2004년)은 나치 독일, 그 중에서도 수괴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를 정면으로 다뤘다. 제 2 차 세계대전 막바지, 패전을 눈 앞에 둔 히틀러가 자살하기까지 마지막 2주를 다룬 이 영화는 당연히 전세계에서 논란이 됐다. 독일인의 시각..

하인리히 히믈러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못지 않은 악명을 떨친 인물이 바로 하인리히 히믈러다. 그는 친위대와 게쉬타포를 이끌며 유대인 뿐 아니라 나치 독일 치하의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로 군림했다. * play 표시가 있는 사진은 play 버튼을 누르면 관련 동영상이 나옵니다. * 하지만 그 자신은 매우 병약한 인간이었다. 위가 좋지 않았고 눈이 나빠 항상 안경을 썼다. 머리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권력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민족적 우월감이 대단해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다. 1900년에 뮌헨에서 태어난 히믈러는 아버지가 교육자였다. 그의 이름은 바이에른 왕국의 하인리히 왕자의 개인교사를 지낸 아버지가 왕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것. 1918년 란트슈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전명 발키리 (블루레이)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이 1944년 7월20일에 시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은 독일군 내에서 일어난 레지스탕스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는 롬멜 장군 등 음모에 가담한 장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독일군은 보복이 두려워 히틀러 앞에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결국 그런 분위기가 독일의 패망에 일조를 한 셈이다. 무의미한 역사적 가정이지만, 만약 슈타우펜베르그의 암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후 독일은 분단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전쟁이 더 빨리 끝났을 수도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 '엑스맨'을 만든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역사적인 7.20 사건을 '작전명 발키리'(Valkyrie, 2008년)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비교적..

작전명 발키리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다. (영화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슈타펜버그로 나오지만 정확한 이름은 슈타우펜베르크이다.) 1907년생인 그는 이름이 말해주듯 독일 귀족 출신이다. 가톨릭 신도였던 그는 잘 생긴 외모와 타고난 체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운동에 만능이었다. 또 문학이나 음악적 소양도 뛰어났기에 육군 대학을 졸업한 뒤 불과 34세에 대령으로 진급할 만큼 촉망받는 장교였다. 동부 러시아 전선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아프리카 튀니지 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아프리카 전투 중 영국 전투기의 습격을 받아 한쪽 눈과 오른손, 왼손의 손가락 2개를 잃는 큰 부상을 당한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그는 독일과 독일 국민을..

영화 2009.01.24

의지의 승리

독일의 여류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의지의 승리'(Triumph of The Will, 1935년)는 프로파간다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4년 9월5일 독일 뉘른베르크시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담은 1시간 50분 분량의 기록물이다. 리펜슈탈은 교차편집과 대비되는 앵글,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영상 등을 이용해 제목 그대로 강인한 나치의 의지와 이를 바라보는 독일 국민들의 기대를 절묘하게 담았다. 내용을 떠나 그림만으로 보는 이를 격동시키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벅찬 환희 등을 절로 느낄 수 있다. 그 바람에 리펜슈탈은 히틀러와 괴벨스 생전에 총애를 받아 2차 세계대전후 전범 재판을 받고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2년 풀려난 그는 일반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