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개그맨(블루레이)

울프팩 2022. 10. 1. 16:19

이장호,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을 오랫동안 한 이명세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감독으로 입봉 했다.

나름 참신한 아이디어로 공들여 쓴 시나리오를 제작사 여러 곳에 보여줬으나 모두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설가 최인호는 호평했으나 정작 제작사들은 무명의 신인에게 영화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배창호 감독에게 상의한 결과 직접 영화를 만들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연출한 데뷔작이 바로 '개그맨'(1988년)이다.

내용은 영화감독을 꿈꾸며 극장식당 카바레에서 일하는 무명의 개그맨 이종세(안성기)가 배우를 꿈꾸는 이발사 문도석(배창호), 극장에서 건달들에게 쫓기다 구출된 여인 오선영(황신혜)을 만나 은행을 터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197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종대와 문도석의 구로공단 은행강도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아마 이 감독이 친했던 작가인 최인호가 당시 펴낸 소설 '지구인'을 참고한 것 같다.

 

소설 지구인은 이종대와 문도석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채 은행강도를 벌인 실화다.

주요 줄기는 실화에서 가져왔지만 여러 설정은 현실에서 이뤄지기 힘든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은 공상에 가깝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요 사건들의 상당 부분은 우연에 의존한다.

이종세가 오선영을 극장에서 만나 합류하는 내용과 탈영병(손창민)에게서 총기를 얻는 장면, 황당하게도 강도들이 강도를 당하며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장면 등은 우연의 반복이다.

 

이 감독은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점철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통해 당시 황금만능주의에 젖은 세태를 블랙 코미디로 풍자했다.

로또나 다름없는 강남 개발 붐을 타고 졸부가 된 사람들과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군부세력은 우연에 의존한 이종세의 은행강도극 만큼이나 열심히 산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런 세상이라면 한낱 무명의 개그맨에 휘둘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으로 왜 하필 이종대 문도석 사건을 이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앞에서 서술한 대로 최인호와 친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감독이 어렵게 만든 이 영화는 개봉 또한 험난했다.

 

하필 제작사 태흥영화사에서 수입한 '다이하드'가 대박이 나며 이 작품의 개봉이 한없이 늦춰졌다.

결국 개봉도 못하고 사장될 뻔했으나 1988년 부산에서 잠깐 극장에 걸렸다가 1989년 뒤늦게 서울에서 개봉했다.

 

그것도 원래 개봉 예정작이 펑크 나서 늦춰지는 바람에 막간을 이용한 임시 개봉이었다.

그렇게 비운의 데뷔작은 저주받은 걸작으로 세간에서 잊혔다.

 

그럼에도 평단에서는 이 작품을 뛰어난 작가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호평했다.

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M' '형사 듀얼리스트' 등에서 보여준 이 감독 특유의 탁월한 영상미학은 이 작품에서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비록 이야기가 낯설고 생뚱맞으며 열린 결말이어서 개운치 않을 수 있지만 1980년대 풍경과 얼굴들, 음악을 보고 들을 수 있어 반가운 작품이다.

안성기 황신혜 외에 전무송 손창민 김세준 최종원 등 낯익은 얼굴들이 잠깐씩 등장한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지만 저작권에 크게 구애받지 않던 시절이라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주제곡 'Plein Soleil', 찰리 채플린의 영화 'Kid' 'Lime Light' 등의 유명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결말은 허무맹랑한 공상에서 도피처를 찾을 수밖에 없던 1980년대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의 시대적 한계일 수 있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오래된 영화인데도 스크래치 없이 복원이 잘 됐으나 전체적으로 뿌옇고 샤프니스가 높지 않아 윤곽선이 두껍다.

 

간간히 잡티와 플리커링도 보이고 디테일이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빛바랜 앨범 같은 화질이다.

 

아무래도 화질보다 오랫동안 묻힌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할 타이틀이다.

음향은 DTS HD MA 모노를 지원한다.

 

음량이 요란한데 목욕탕처럼 소리가 너무 울려서 한글자막을 켜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다.

부록으로 이 감독과 한예종 영화과 교수인 김홍준 교수가 함께 한 음성해설이 들어 있다.

 

훌륭하게도 음성해설에도 한글 자막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감독 배창호가 이발사로 출연. 배창호는 연세대 상대 시절 연극반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전무송이 극 중 영화감독, 가수 장나라의 아버지 주호성이 조연출로 나온다.
안성기가 콧수염을 붙이고 연기한 개그맨 이종세는 찰리 채플린을 모델로 했다. 원래 감독은 1960, 70년대 '웃으면 복이와요' '쇼쇼쇼' 등에 출연해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언 콤비 남철 남성남을 모델로 했으나, 이들 역시 채플린을 모델로 한 만큼 사실상 채플린이 모델인 셈이다.
만화광인 이 감독의 단골 만화가게가 영화에 등장
극 중 나오는 영화는 리처드 기어가 출연한 '코튼 클럽'이다. 태흥영화사에서 수입한 작품이어서 이 영화에 등장. 이 장면도 실제 극장에서 촬영. 지금은 보기 힘든 세로 자막이 등장한다.
손창민이 탈영병으로 등장. 블랙 코미디여서 배우들의 연기가 좀 과장됐다. 이 감독은 음성해설에서 "이 작품의 블루레이가 블랙이 잘 살아 좋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부제로 시나리오를 썼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때부터 배 감독에게 배역을 제의했다.
이 감독은 배창호 감독의 '철인들' '고래사냥 1, 2'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날'의 조감독을 했다.
원래 영화음악은 이 감독의 친구인 가수 김수철이 맡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영화와 잘 붙지 않아 감독이 집에서 고른 음악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음향 담당자에게 갖다주고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안성기는 수염을 아교풀로 붙이고 출연했으나 입을 크게 움직이면 떨어져서 곤란을 겪었다.
이 감독은 '기쁜 우리 젊은날' 조감독 시절 인천에 살던 황신혜를 한 달간 출퇴근 시키며 연기지도를 했다. 그때 인연으로 이혼 후 작품 출연을 하지 않던 황신혜가 출연하게 됐다.
시골 마을은 임계에서 촬영. 이 감독은 이때 눈여겨 본 이 곳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제대로 활용했다.
은행 강도 장면은 임계의 실제 은행에서 촬영.
황신혜가 부르는 노래 '수지 큐'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남철 남성남을 흉내냈다. 촬영은 이주일이 출연했던 극장식 캬바레 '초원의 집'에서 영업하지 않는 낮시간에 했다.
안성기는 이 감독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악역을 제안하자 실망해 이민까지 갈 정도로 큰 고민을 했다. 이제 자신이 영화계에서 뒤로 밀린다는 우려를 해서 처음에 해당 배역을 거절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맡았는데, 그 역할로 호평을 받았다.
김세준이 자동차 정비공으로 출연. 이 감독은 처음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스타일의 콤비가 등장하는 진지한 영화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
주인공 일행이 유모차를 가장해 기차역에서 달아나는 부산진역 장면은 수색역에서 촬영.
촬영은 작고한 유영길 감독이 맡았다. 이종세의 아파트에 등장하는 공중전화 박스와 그림액자 등 일부 소품은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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