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은 위대한 공포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명작이다.
이 작품은 귀신이나 연쇄살인마 같은 끔찍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을 다뤘다.
큐브릭 감독은 참으로 길고 험난한 내면의 싸움을 통해 외부로 드러난 상대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공포가 얼마나 더 무서운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래서 이 작품이 여타의 공포물과 다른 대접을 받는다.
심지어 원작인 스티븐 킹의 소설보다 더 현실적인 공포를 묘사했다.
그런 위대한 작품의 속편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도전일 수 있다.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의 '닥터 슬립'(Doctor Sleep, 2019년)은 여기에 도전장을 던진 작품이다.
샤이닝의 속편으로 기획된 이 작품은 전작에서 어린 소년이었던 대니(이완 맥그리거)가 훌쩍 자라 중년의 사내가 된 뒤 다시 맞닥뜨리게 된 공포를 다루고 있다.
내용은 대니처럼 샤이닝이라는 신비한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을 사냥해서 죽인 뒤 그들의 능력을 흡수해 살아가는 악당들인 트루낫 일당과 주인공 일행이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다.
샤이닝은 텔레파시처럼 일종의 영적 초능력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조금씩 다르다.
이를 노리는 악당들은 이 능력을 빼앗아 불로장생, 영생을 꾀한다.
샤이닝을 찾아내 죽인 뒤 흡수하는 과정은 피를 빠는 드라큘라처럼 흡혈귀 전설과 닮았다.
여기에 누구를 막론하고 꾸는 꿈인 불로장생이 맞닿으면서 탐욕과 죄악이 요동친다.
대니는 강력한 샤이닝을 구사하는 12세 소녀 아브라(카일리 커란)와 손잡고 악당들을 물리친다.
그들이 선택하는 결전의 장소는 하필 샤이닝의 무대였던 공포의 오버룩 호텔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전작과 동일한 세트, 심지어 전작에 등장한 죽은 자들과 공포스러운 장면까지 오마주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흉내 내며 전작의 인기를 소환한다.
이를 위해 플래너건 감독은 전작의 출연진들과 비슷한 배우들을 기용해서 해당 장면들을 다시 찍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슷해도 잭 니컬슨이 아니고 그때 그 장면이 아닌 것은 어쩔 수 없다.
전작이 오버랩되며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지만 전작의 깊이와 공포를 그대로 가져오기는 힘들다.
결정적으로 이미테이션은 오리지널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샤이닝을 좋게 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대치를 기준으로 삼은 이야기다.
샤이닝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선악 대결이 명암처럼 뚜렷한 이 작품이 한 편의 액션극이나 좀비처럼 수월하게 보일 수 있다.
사실 샤이닝은 애매모호한 결말과 불충분한 설명으로 점철된 친절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관객들은 이 작품이 가볍고 편할 수 있다.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의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야기나 메시지가 명쾌한 영화를 만들었다.
다만 내면의 공포를 섬세한 심리묘사로 다룬 큐브릭의 샤이닝과 달리 그저 줄거리를 쫓아서 심령극과 액션물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더 이상 장중한 미장센느 속에 배우들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살아 있는 큐브릭 특유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는 작품이다.
감독이 바뀌었고 이야기도 달라졌으니 그럴 만하다.
그러니 샤이닝의 속편이면서도 결이 다른 이 영화를 샤이닝과 비교하면 곤란하다.
스핀오프처럼 오락물에 가까운 샤이닝의 아류작 정도로 봐야 할 듯.
그래도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이 작품에 만족한 모양이다.
그는 워낙 큐브릭 분위기로 흘러간 샤이닝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던데, 블루레이에 실린 부록을 보면 오히려 이 작품이 큐브릭이 바꿔놓은 원작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며 만족을 표시했다.
예를 들어 원작 소설에서는 죽지 않았으나 샤이닝에서는 죽은 것으로 처리한 흑인 요리사 딕, 원작 소설에서는 불에 타서 없어지지만 샤이닝에서는 그대로 남게 되는 오버룩 호텔을 이 영화는 원작 소설과 샤이닝의 설정을 절반씩 가져와 되살렸다.
이런 부분들은 흥미로우면서 영리한 선택이다.
참고로 4K 타이틀은 3장의 디스크에 2시간 30분 분량의 극장판과 이보다 30분 늘어난 감독판이 모두 들어 있다.
4K 타이틀은 극장판을 수록했으며 2장에 블루레이에 감독판과 극장판을 각각 담았다.
그러나 30분 늘어난 감독판은 영화의 이해를 돕는 설명이 조금 늘어나긴 했으나 없어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2160p U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4K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윤곽선이 부드럽고 색감이 은은하지만 디테일이 좋다.
또 콘트라스트가 깊어서 명확한 흑백 대비로 공포물의 묘미를 제대로 살렸다.
오히려 디지털보다 필름 느낌이 묻어나는 영상이다.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음향은 리어 채널을 적극 활용해서 서라운드 효과가 잘 살아 있다.
특히 공포물은 음향 효과를 얼마나 살리느냐에 따라서 공포감이 좌우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음향 효과가 제 역할을 잘해줬다.
부록으로 제작진 인터뷰, 제작과정, 다큐멘터리 등이 한글자막과 함께 HD 영상으로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디와 트램프(블루레이) (2) | 2020.02.29 |
---|---|
경계선(블루레이) (0) | 2020.02.25 |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블루레이) (4) | 2020.02.23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4K 블루레이) (0) | 2020.02.16 |
안나(블루레이) (0) | 2020.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