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감독상, 작품상을 놓고 경합을 벌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년)는 미국 현대사의 충격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1969년 8월 9일에 찰리 맨슨 일당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부인이자 여배우인 샤론 테이트를 잔혹하게 살해한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미국을 떠돌던 찰리 맨슨 일당은 마약에 취해 샤론 테이트와 친구들을 다른 사람으로 오인해 총으로 쏘고 칼로 난도질을 해 죽였다.
당시 샤론 테이트는 임신 8개월이었다.
어려서부터 감옥을 들락거린 찰리 맨슨은 수감 시절 기타를 배워 1967년 출소한 뒤 작곡도 하고 노래도 열심히 불렀다.
그때 만든 노래들을 음반 기획자였던 테리 멜처에게 보여줬으나 혹평을 들었다.
테리 멜처는 여배우이자 유명 가수인 도리스 데이의 아들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맨슨은 테리 멜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교주처럼 따르던 히피 무리들과 비벌리 힐즈의 멜처 집으로 찾아갔다.
공교롭게 멜처는 이사를 갔고 그 집을 산 것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샤론 테이트였다.
이를 알리 없던 맨슨은 추종자들에게 멜처의 집을 찾아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흔적을 남기라고 명령했다.
환각제를 먹고 테이트의 집을 습격한 맨슨 일당 4명은 테이트와 친구들을 살해한 뒤 희생자의 피로 벽에 낙서를 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폴란스키 감독은 당시 런던에 출장 가 위기를 모면했다.
맨슨과 범인들은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72년 사형제가 폐지되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결국 감옥에서 숨졌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고 타란티노 감독뿐 아니라 다른 감독들도 영화로 만들었다.
또 가수 브라이언 워너는 맨슨의 이름을 따서 마릴린 맨슨이라는 인더스트리얼 록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의 마릴린과 찰리 맨슨의 맨슨을 합친 밴드명은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인간의 양면성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타란티노 감독은 이 사건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지 않은 점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릭 달튼이라는 가상의 영화배우와 마찬가지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가상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를 내세워 실제 사건을 완전히 다르게 비틀어 버렸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실제 역사와 동일하게 진행되다가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가 끼어들면서 사건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어찌 보면 판타지다.
달튼과 부스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마치 수호신처럼 테이트의 옆집으로 이사를 오고 사건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타란티노 감독은 사람들이 떠올리기 싫어하는 끔찍했던 1969년의 여름을 행복한 한때로 바꿔 놓았다.
비단 관객뿐 아니라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나 관계된 사람들에게도 위안일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역사에서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이를 꿈 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조금이나마 치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서 타란티노 감독은 1960년대 말 할리우드, 미국 영화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추억한다.
비단 아픔으로만 점철된 시기는 아니었다는 듯 이 시대에 찬란했던 스타들에 대한 추억과 할리우드 거리의 풍경들을 그대로 재현해 보여준다.
특히 스티브 맥퀸과 이소룡의 추억, TV 서부극 스타로 떠올랐으나 할리우드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하자 이탈리아로 건너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영웅이 돼서 돌아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야기 등이 영화 속에 그대로 재현됐다.
다만 이런 배경과 사건들을 백과사전처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는 일.
타란티노 감독은 알아듣는 사람에게만 통하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처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다 보니 사건과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재밋거리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일 수 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샤론 테이트 사건마저도 앞뒤 맥락이 닿지 않는 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지극히 미국적이며 지극히 역사적이고, 영화에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지극히 전문적인 영화다.
즉 보편타당한 정서를 공유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타란티노 감독이 재현한 1960년대 영화판 이야기와 실존 인물들에 대한 고증은 놀랍도록 훌륭하다.
샤론 테이트를 연기한 마고 로비를 비롯해 스티브 맥퀸으로 등장한 데미언 루이스는 실존 인물들과 깜짝 놀랄 만큼 닮았다.
더불어 한물 간 스타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를 받쳐주는 스턴트맨 역의 브래드 피트의 연기도 훌륭했다.
여기에 할리우드 거리를 막고 1960년대 풍으로 다시 꾸민 뒤 촬영한 길거리 풍경은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할리우드 영화사에 대한 배경 지식을 공부하고 샤론 테이트 사건을 좀 알고 본다면 새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나름 꽤나 정교하고 훌륭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디테일, 즉 보석처럼 빛나는 '쿠엔테일'을 볼 수 있다.
4K 타이틀은 4K와 일반 블루레이 등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됐다.
2160p UHD의 2.39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4K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전체적으로 약간 어둡지만 1960년대 색감 등이 잘 살아 있다.
DTS HD MA 7.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리어 채널을 적절하게 활용해 소리가 채널별로 잘 분배됐고, 전체적으로 울림이 부드럽다.
부록으로 삭제 장면, 극 중 TV 서부극 '바운티로', 제작과정, 제작진 인터뷰 및 자동차, 촬영 현장, 의상 등에 대한 설명이 한글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부록은 모두 HD 영상으로 수록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닥터 슬립(4K 블루레이) (2) | 2020.02.24 |
---|---|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블루레이) (4) | 2020.02.23 |
안나(블루레이) (0) | 2020.02.15 |
원데이(블루레이) (0) | 2020.02.09 |
곡성(블루레이) (2) | 2020.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