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생이던 1970년대 중반 어머니 손을 잡고 동네 동시상영관에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자그마치 3시간이 넘는 그 영화는 무척이나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Ben-Hur, 1959년)였다. 제작된 지 10여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동네를 떠돌며 상영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고 나서, 영화 감상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민학생은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는 걸맞지 않는 영화였다.
예나 지금이나 극장을 찾는 이유는 집에 있는 TV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화면과 웅장한 음향이 주는 즐거움에 있다. 벤허가 제작된 195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TV가 널리 보급되면서 위기를 맞게된 미국 영화사들은 타개책으로 TV가 줄 수 없는 대화면의 위력에 집중했다. 그래서 와이드스크린에 걸맞는 대작 영화를 기획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벤허였다.
기획 의도 답게 벤허는 엄청난 규모의 스펙타클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선 3시간 30분이라는 상영 시간이 그렇고, 방대한 출연진과 무시무시한 박력을 선사하는 전차경주와 해전 등은 진정한 영화의 묘미를 선사한다.
이 작품 덕분에 와이드스크린의 대작들이 줄줄이 제작되면서 영화산업이 번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대한극장만 유일하게 70밀리 영사기를 갖춰 이 영화의 좌우로 떡 벌어지는 와이드화면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었고, 다른 극장들은 35밀리 프린트로 상영해 대한극장만큼 영화의 위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대단한 점은 명장들의 장인 정신에 있다. 지금 같으면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했을 만한 일들을 당시에는 모두 손으로 처리했다.
무려 600여미터 길이의 5층짜리 전차 경주장부터 실제 크기의 갤리선을 직접 만들고, 해전을 찍기 위해 인공 호수를 팠다. 동원된 인원만 엑스트라 포함해 무려 5만명.
저도 모르게 긴장해 보게 되는 아슬아슬한 전차경주 장면도 특수 효과없이 배우들과 스턴트맨들이 부상을 당해가며 직접 찍었다. 그러니 살과 땀으로 빚어낸 사실감이 디지털로 만든 가짜 영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박진감을 선사한다.
볼거리 뿐 아니라 완벽을 기하기로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세심한 연출력은 영화의 무게감을 더 한다. 또 이 작품으로 찰톤 헤스톤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물량 공세를 과시한 작품이긴 하지만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스펙타클한 영상 등이 더해져 와이드스크린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 됐다. 무려 반세기 전 작품인데도 영화의 깊이와 진정성이 주는 감동은 여전하다.
1080p 풀HD의 2.76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3장으로 구성됐으며, 제작연도를 의심할 만큼 최고의 화질로 복원됐다. 더러 포커스가 명료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나 생생한 색감과 샤프니스 등을 보면 뛰어난 복원력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뛰어나진 않지만 명확하고 섬세한 소리를 들려준다. 주옥같은 부록들은 영화학자와 찰톤 헤스톤의 음성해설, 1925년 제작된 무성영화판 벤허, 풍성한 제작다큐멘터리 등 콜렉터스 에디션으로 출시된 DVD 타이틀과 동일한데, 안타깝게도 한글자막이 전혀 없다.
DVD는 모두 한글자막이 들어 있는데 블루레이는 빠졌으니 제작사의 무성의를 탓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