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여름에 찾아갔던 그리스 산토리니의 하늘은 진한 코발트빛이었다.
그 아래 그보다 더 진한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그 위로 태양은 세상을 녹일듯 이글거렸다.
그토록 뜨겁게 타오르던 거리도 밤이면 서늘한 바람 아래 삭아들고, 늦도록 술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 사이로 흥겨운 음악이 흘러 넘쳤다.
자연과 삶이 이토록 열정적이다 보니 페드라 같은 극단적인 사랑과 비극이 나올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스 닷신 감독의 '페드라'(Fedra, Phaedra, 1962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페드라의 비극을 현대물로 옮긴 걸작이다.
신화 속 페드라는 전처가 낳은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다.
크레타 섬의 황소머리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영웅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동생인 페드라와 결혼한다.
페드라는 전처 소생인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유혹하지만, 히폴리토스가 이를 거부하자 아들이 능욕하려 했다는 모함성 글을 남기고 자결한다.
이를 보고 분노한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아들을 벌해 달라고 저주한다.
애써 변명하지 않은 아들 히폴리토스는 전차를 몰고 해변 절벽을 달리다가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 괴물을 피하려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닷신 감독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고대의 비극을 현대로 끌어냈다.
테세우스 자리에 196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그리스 선박산업의 거부를 앉히고 그의 부인과 해외 유학중인 아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닷신의 카메라는 집요하다.
사랑의 광기에 눈이 먼 여인의 질투와 애욕이 점층적으로 타오르는 과정을 유장한 영상으로 묘사했다.
특히 빗물에 번진 유리창 너머로 잡은 두 사람의 정사 씬은 표현력이 뛰어나다.
여기에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이 어우러져 비극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압권은 아들이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크게 틀어놓고 절규하듯 페드라의 이름을 부르며 최후를 맞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비극적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 이 장면에 흐르던 음악은 1980년대 FM 영화음악 시간에 안소니 퍼킨스의 대사와 더불어 참으로 많이 들었다.
누가 페드라의 비극을 이토록 가슴 절절한 현대극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리피피'와 더불어 닷신 감독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꼽을 만 하다.
영화 속 풍광은 흑백이지만 산토리니에서 봤던 푸른 하늘과 새파란 지붕을 이고 있는 흰 색 집들이 늘어선 그림같은 풍광이 중첩돼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총천연색 감흥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1.66 대 1 와이드스크린의 DVD 타이틀은 화질이 좋지 않다.
50년 전 작품이고 그동안 한 번도 DVD로 나온 적이 없으니, 화질이 좋지 않아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반갑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스테레오를 지원하며, 부록은 전무하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 play 버튼이 붙은 사진은 버튼을 누르시면 예고편 등 동영상이 재생됩니다. * 신화 속 테세우스는 거의 반인반신격 영웅이었다. 이를 닷신 감독은 1960년대 세계를 호령했던 그리스 선박산업의 거부로 바꿔 놓았다. 실존 인물을 굳이 꼽는다면 오나시스 정도 될 듯 싶다. 비극의 주인공 페드라는 닷신 감독의 두 번째 아내이자 그리스 문화계의 아이콘이었던 멜리나 메르쿠리가 연기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비극은 페드라 컴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낳았다. 이 영화는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시된 코드를 다뤘다.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아들 역할은 선병질적인 마스크를 지닌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 '사이코'와 더불어 이 역할이 참 잘 어울렸다. 지금 한창 올림픽이 열리는 런던의 50년전 모습이다. 닷신 감독은 이 영화의 감독 뿐 아니라 각본까지 쓰고 제작까지 맡았으며, 극중 크리스토라는 역할로 연기도 했다. 페드라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해 플루타르크 영웅전,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히폴리토스'와 프랑스 극작가 라신이 쓴 '페드라' 등으로 여러 번 문학작품화 됐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작품에 따라 어머니와 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결말 등이 약간씩 다르다. 두 사람의 정사를 빗물이 흘러 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잡은 장면은 표현력이 압권이다. 이 영화는 1967년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시 아버지의 아내라는 설정이 애인으로 바뀌고, 정사 장면 등이 삭제된 채 개봉됐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겸 가수이자 정치가였다. 조부가 아테네 시장, 부친이 국회의원, 삼촌이 사회주의 정당 당수로 정치가 집안에서 자란 그는 1967년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이 재산과 국적을 몰수하고 추방하는 바람에 해외를 전전했다. 메르쿠리는 그리스 군사 정권이 몰락한 후 1974년 돌아와 국회의원이 됐고 1981년 사회주의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 엘진 마블 송환운동을 펼치는 등 그리스 문화 부흥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줄담배였던 그는 1994년 뉴욕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007의 상징이었던 애스톤마틴 자동차가 여기서는 신화 속 히폴리토스의 목숨을 앗아간 전차를 대신한다. 1911년 미국에서 러시아 유태계로 태어난 줄스 닷신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 불던 1952년 동료 감독이 공산주의자로 고발하는 바람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미국을 떠났다. 이후 닷신 감독은 그리스에 정착해 메르쿠리를 만났고 그를 기용해 만든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칸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 메르쿠리는 '페드라' 등 닷신 감독의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그리스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1966년 닷신 감독과 결혼했다. 닷신 감독은 그리스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1967년 프랑스로 옮겨 메르쿠리와 함께 군부독재 반대 운동을 펼쳤다. 두 사람은 1974년 그리스에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돌아왔다. 닷신 감독은 1981년 미국 국적을 버리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해 '그리스인보다 그리스를 더 사랑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2008년 96세로 타계했을 때 그리스 총리까지 나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을 냈다. 숨길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의 위험하고도 대담한 사람을 꽉 채운 프레임 안에 그림자를 이용해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1980년대가 워크맨의 시대였다면 60년대와 70년대는 손전축과 포터블 라디오의 시대였다. 영화 속 SP 음반의 추억이 새롭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절규하듯 페드라의 이름을 외치며 죽음으로 치닫는 엔딩은 비극의 정점을 찍는 명장면이다. 닷신 감독은 "페드라의 비극이 사회에서 금기시된 근친상간에서 비롯된다"고 짚었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러브 테마는 메르쿠리가 불렀다.
그 아래 그보다 더 진한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그 위로 태양은 세상을 녹일듯 이글거렸다.
그토록 뜨겁게 타오르던 거리도 밤이면 서늘한 바람 아래 삭아들고, 늦도록 술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 사이로 흥겨운 음악이 흘러 넘쳤다.
자연과 삶이 이토록 열정적이다 보니 페드라 같은 극단적인 사랑과 비극이 나올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스 닷신 감독의 '페드라'(Fedra, Phaedra, 1962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페드라의 비극을 현대물로 옮긴 걸작이다.
신화 속 페드라는 전처가 낳은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다.
크레타 섬의 황소머리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영웅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동생인 페드라와 결혼한다.
페드라는 전처 소생인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유혹하지만, 히폴리토스가 이를 거부하자 아들이 능욕하려 했다는 모함성 글을 남기고 자결한다.
이를 보고 분노한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아들을 벌해 달라고 저주한다.
애써 변명하지 않은 아들 히폴리토스는 전차를 몰고 해변 절벽을 달리다가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 괴물을 피하려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닷신 감독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고대의 비극을 현대로 끌어냈다.
테세우스 자리에 196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그리스 선박산업의 거부를 앉히고 그의 부인과 해외 유학중인 아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닷신의 카메라는 집요하다.
사랑의 광기에 눈이 먼 여인의 질투와 애욕이 점층적으로 타오르는 과정을 유장한 영상으로 묘사했다.
특히 빗물에 번진 유리창 너머로 잡은 두 사람의 정사 씬은 표현력이 뛰어나다.
여기에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이 어우러져 비극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압권은 아들이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크게 틀어놓고 절규하듯 페드라의 이름을 부르며 최후를 맞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비극적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 이 장면에 흐르던 음악은 1980년대 FM 영화음악 시간에 안소니 퍼킨스의 대사와 더불어 참으로 많이 들었다.
누가 페드라의 비극을 이토록 가슴 절절한 현대극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리피피'와 더불어 닷신 감독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꼽을 만 하다.
영화 속 풍광은 흑백이지만 산토리니에서 봤던 푸른 하늘과 새파란 지붕을 이고 있는 흰 색 집들이 늘어선 그림같은 풍광이 중첩돼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총천연색 감흥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1.66 대 1 와이드스크린의 DVD 타이틀은 화질이 좋지 않다.
50년 전 작품이고 그동안 한 번도 DVD로 나온 적이 없으니, 화질이 좋지 않아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반갑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스테레오를 지원하며, 부록은 전무하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 play 버튼이 붙은 사진은 버튼을 누르시면 예고편 등 동영상이 재생됩니다. * 신화 속 테세우스는 거의 반인반신격 영웅이었다. 이를 닷신 감독은 1960년대 세계를 호령했던 그리스 선박산업의 거부로 바꿔 놓았다. 실존 인물을 굳이 꼽는다면 오나시스 정도 될 듯 싶다. 비극의 주인공 페드라는 닷신 감독의 두 번째 아내이자 그리스 문화계의 아이콘이었던 멜리나 메르쿠리가 연기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비극은 페드라 컴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낳았다. 이 영화는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시된 코드를 다뤘다.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아들 역할은 선병질적인 마스크를 지닌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 '사이코'와 더불어 이 역할이 참 잘 어울렸다. 지금 한창 올림픽이 열리는 런던의 50년전 모습이다. 닷신 감독은 이 영화의 감독 뿐 아니라 각본까지 쓰고 제작까지 맡았으며, 극중 크리스토라는 역할로 연기도 했다. 페드라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해 플루타르크 영웅전,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히폴리토스'와 프랑스 극작가 라신이 쓴 '페드라' 등으로 여러 번 문학작품화 됐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작품에 따라 어머니와 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결말 등이 약간씩 다르다. 두 사람의 정사를 빗물이 흘러 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잡은 장면은 표현력이 압권이다. 이 영화는 1967년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시 아버지의 아내라는 설정이 애인으로 바뀌고, 정사 장면 등이 삭제된 채 개봉됐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겸 가수이자 정치가였다. 조부가 아테네 시장, 부친이 국회의원, 삼촌이 사회주의 정당 당수로 정치가 집안에서 자란 그는 1967년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이 재산과 국적을 몰수하고 추방하는 바람에 해외를 전전했다. 메르쿠리는 그리스 군사 정권이 몰락한 후 1974년 돌아와 국회의원이 됐고 1981년 사회주의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 엘진 마블 송환운동을 펼치는 등 그리스 문화 부흥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줄담배였던 그는 1994년 뉴욕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007의 상징이었던 애스톤마틴 자동차가 여기서는 신화 속 히폴리토스의 목숨을 앗아간 전차를 대신한다. 1911년 미국에서 러시아 유태계로 태어난 줄스 닷신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 불던 1952년 동료 감독이 공산주의자로 고발하는 바람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미국을 떠났다. 이후 닷신 감독은 그리스에 정착해 메르쿠리를 만났고 그를 기용해 만든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칸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 메르쿠리는 '페드라' 등 닷신 감독의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그리스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1966년 닷신 감독과 결혼했다. 닷신 감독은 그리스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1967년 프랑스로 옮겨 메르쿠리와 함께 군부독재 반대 운동을 펼쳤다. 두 사람은 1974년 그리스에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돌아왔다. 닷신 감독은 1981년 미국 국적을 버리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해 '그리스인보다 그리스를 더 사랑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2008년 96세로 타계했을 때 그리스 총리까지 나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을 냈다. 숨길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의 위험하고도 대담한 사람을 꽉 채운 프레임 안에 그림자를 이용해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1980년대가 워크맨의 시대였다면 60년대와 70년대는 손전축과 포터블 라디오의 시대였다. 영화 속 SP 음반의 추억이 새롭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절규하듯 페드라의 이름을 외치며 죽음으로 치닫는 엔딩은 비극의 정점을 찍는 명장면이다. 닷신 감독은 "페드라의 비극이 사회에서 금기시된 근친상간에서 비롯된다"고 짚었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러브 테마는 메르쿠리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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