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힉스 감독의 '삼나무에 내리는 눈'(Snow Falling On Cedars, 1999년)은 미국의 아픈 역사에 메스를 들이 댄 영화다.
그것도 인디언 학살이나 노예제처럼 먼 옛날이 아닌 그리 얼마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과거의 상처다.
이 영화는 미국이 미국 시민을 어떻게 다루었는 지 치부를 드러낸 작품이다.
어찌보면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내용은 1950년대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주검이 발견되면서 마녀 사냥처럼 미국 시민권자인 일본인 젊은이가 살인범으로 몰리게 된 이야기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제 2 차 세계대전을 치른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실 여부를 떠나 일본인 피의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다.
오히려 일본계 젊은이는 적성국 출신이어서 받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전쟁 중 미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럼에도 돌아온 전쟁 영웅을 바라보는 미국 백인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일본인 피의자를 앞에 두고 재판장은 공판을 진행하며 배심원과 청중들에게 한마디 한다.
"내일이 진주만공격이 있은 지 9주년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본 재판은 이와 무관하다는 점을 알립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
모든 정황은 일본계 젊은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아무도 진실을 캐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구세주로 나선 존재는 젊은이와 결혼한 일본 여성과 과거에 사랑했던 백인 청년이다.
그가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힘은 지방지 기자였던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글 한자락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명예롭게 행동했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하자."
영화는 증오와 갈등으로 대립했던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여주지만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정작 힉스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용기다.
실제로 미국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고 나서 미국은 일본내 거주하던 약 12만 명의 일본인을 미국내 7개주에 걸쳐 수용소를 짓고 분산 수용했다.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지만, 일본과 내통해 기밀을 빼돌리고 미국내에서 소요를 일으킬까봐 우려한 조치다.
전쟁이 끝난 뒤 수용소는 철거되고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미국은 그것으로 일단락짓지 않았다.
1970년대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은 한때 일본인을 수용소에 가뒀던 점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수용자에 갇혔던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달러씩 배상하는 법에 서명했고, 뒤를 이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생존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아픈 기억을 갖게 한 데 대해 미국 정부는 사과를 드린다.
잘못된 과거를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당신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해 정의를 바로 세우려 한다."
비록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미국은 정의가 무엇인 지 제대로 보여줬다.
명명백백한 위안부 강제동원과 강제징용, 역사침탈을 부인하고 사과를 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일본 정부와 위정자들의 행동과 너무 대비된다.
영화는 이처럼 무거운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다.
힉스 감독은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인데도 너무나도 정갈한 영상과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잘 살렸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 속에 펼쳐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한 켠이 아리게 만든다.
에단 호크의 연기도 좋았고 일본 여성을 연기한 유키 쿠도, 이 작품으로 데뷔한 한국계 배우 릭 윤도 분위기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다만 위기에 처한 일본인들은 결국 그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구하지는 못한다.
그저 백인의 온정이 베푼 결과일 뿐이어서 한 켠으로 씁쓸하다.
어쩌면 그것이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동양인들의 현실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주제를 밀도있게 다룬 내용이나 아름다운 영상 등이 돋보이는 아주 우수한 작품이다.
2.3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지글거림이 보이는 등 아쉽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며 감독의 음성해설과 삭제장면, 제작과정 등 다양한 부록이 들어 있으나 한글 자막을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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