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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이다(블루레이)

울프팩 2022. 5. 28. 11:16

폴란드의 생소한 감독 파벨 파블리코프스키(Pawel Pawlikowski) 감독이 만든 영화 '이다'(Ida, 2013년)는 특이한 작품이다.

우선 독특한 형식이 눈길을 끈다.

 

2000년대 영화이지만 고전 영화처럼 4 대 3 풀 스크린 포맷의 흑백으로 만들었다.

이런 방식이 시대에 뒤처진 것 같지만 이 작품에서는 독특한 미적 감각을 발휘한 차별화 요소가 됐다.

 

여백의 미를 살린 아름다운 흑백 영상

영화의 어두운 배경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흑백 영상이 강렬하게 부각하는 작용을 했다.

영상의 구성도 재미있다.

 

여백을 충분하게 살린 흑백 영상은 마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하늘과 숲, 눈 덮인 벌판 등으로 꽉 들어찬 배경은 공간을 가득 메우면서도 마치 비어 있는 듯한 효과를 준다.

 

그 여백은 고즈넉한 사색의 진중함과 비움으로 아름다움을 채우는 동양적 선(禪) 사상과 닿아 있다.

물론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이 선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부작용을 알았던 모양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카메라의 구도다.

이 작품에서 특이하게 인물들은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다.

 

주로 아래쪽 한 구석에 인물이 몰리면서 목 윗부분만 주로 등장한다.

이런 방식은 공간 속 객체라는 인물의 존재 방식을 부각하면서 역으로 공간과 더불어 인물을 주목하게 만든다.

 

파벨리코프브스키 감독은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방식이 식상해 카메라를 위로 올렸다가 세상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이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우연히 찾아낸 특이점이다.

 

인물이 치우친 영상은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물론 모든 영화에 이런 방식이 어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신의 한 수가 됐다.

 

폴란드의 치부 예드바브네 학살

반면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줄거리는 수녀원에서 홀로 자란 안나(아가타 트루제부초우스카 Agata Trzebuchowska)가 어느 날 이모 완다(아가타 쿠레샤 Agata Kulesza)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간다.

 

알고 보니 안나는 이다라는 본명을 가진 유대인이었다.

자신이 왜 수녀원에서 홀로 자랐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안나에게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완다가 피의 뿌리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면서 뜻밖의 충격적 사실이 밝혀진다.

 

이 비밀은 폴란드의 알려지지 않은 아픈 역사를 들춰내며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문제는 이에 대한 설명이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10일 발생한 폴란드 예드바브네(Jedwabne) 마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사건이다.

흔히 유대인 학살이라면 당연히 나치 독일의 잔혹 범죄를 떠올리지만 뜻밖에도 예드바브네 사건에서는 폴란드인들이 만행의 주인공이다.

 

3,000명이 살던 폴란드의 마을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 사람들이 같은 마을 주민인 유대인 1,600명을 헛간에 몰아넣고 태워 죽인 사건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나치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유대인 혐오가 만연했다.

 

폴란드의 예드바브네 사람들은 나치의 인종정책을 빌미로 평소 유대인에게 갖고 있던 반감을 잔혹하게 표출했다.

폴란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폴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20만 명이 나치가 아닌 폴란드인들의 손에 죽었다.

 

그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유대인, 집시 등 다양한 민족이 폴란드 인구의 32%를 차지했으나 전후 3%까지 떨어지면서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다.

결국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단일 민족 국가의 틀을 세운 셈이다.

 

폴란드 혈통의 미국 역사학자 얀 토마시 그로스는 2000년 예드바브네 학살을 온 천하에 알리는 책 '이웃들'을 써서 충격을 줬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폴란드인들의 유대인 학살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들을 제시했다.

 

연출의 모호성, 그럼에도 아름다운 영화

영화는 예드바브네 학살을 암시하는 다양한 내용들이 등장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은 "이 영화가 역사적 비극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라 두 인물의 관계와 변화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여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모르는 관객들로서는 후반부의 변화가 생경할 수 있다.

특히 예드바브네 학살이 두 인물의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중요 사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감독의 모호한 연출이 여러모로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상만으로도 참 아름다운 영화다.

다만 연출의 모호성을 감안해 배경 지식을 알고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1080p 풀 HD의 4 대 3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윤곽선이 명료하고 은은한 흑백 대비가 잘 살아 있다.

 

특히 4 대 3 화면비가 사람에 따라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가로를 부각하는 수평적 확대보다 숲 등 공간의 높이를 강조하는 영상이 많아 오히려 잘 어울린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영화 성격상 잔잔한 편이어서 서라운드 효과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부록으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 감독 인터뷰 및 감독과 관객의 대화 영상, 제작과정 등이 한글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부록들도 HD 영상으로 제작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작품은 서양 풍경화처럼 인물들 위로 여백이 많다. 영화는 1960년대 폴란드가 배경이다.
제작진은 수녀원 장면을 클리몬토브에 있는 자모이스키 궁전에서 찍었다. 자모이스키는 16세기 폴란드의 재상을 지낸 귀족이었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은 14세때 폴란드를 떠나 영국에서 자라 옥스포드대학을 나왔으며 BBC에서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4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13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이다, 즉 안나를 연기한 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원래 배우가 아니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동료 감독이 바르샤바 카페에서 우연히 발견한 여대생이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은 동료 감독이 찍어 보낸 사진을 보고 아가타를 만났다.
극 중 판사로 나오는 안나의 이모 완다는 감독이 옥스포드대 재학 시절 친했던 폴란드 출신 교수의 지적이고 매력적인 부인 헬레나 브루스 월린스카가 모델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부인은 1950년대 폴란드에서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해 숙청했던 판사였다. 이후 폴란드는 영국정부에 반인륜 범죄 혐의로 부인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감독이 완다 역할에 반영했다.
이 작품은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4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13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1,600명이 죽고 단 7명만 살아남은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은 줄곧 묻혀 있다가 2000년대 들어 알려졌다.
영화 '엑스맨'에서 어린 매그니토가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의 생존자로 등장한다.
여백을 잘 살린 영상은 루카즈 잘 촬영감독이 찍었다. 원래 촬영감독이 있었으나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의견이 맞지 않아 해고됐다. 이후 감독이 촬영팀에 있던 루카즈 잘을 촬영감독으로 지목해 이 작품으로 데뷔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 폴란드에서는 재즈가 인기였다. 감독은 처음부터 흑백으로 찍을 생각을 했다.
색소폰 연주자로 나온 배우는 원래 클라리넷을 연주한 음악가 출신이다.
완다 역의 아가카 쿠레샤는 폴란드 국립연극아카데미를 나온 오랜 경력의 배우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할머니도 유대인이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다.
이 영화는 공산당에서 금기시한 천주교의 젊은 수녀와 공산당 권력의 핵심인 판사의 어울리지 않는 동행이라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은 인물을 하단에 배치해 촬영하면서 나중에 자막을 넣을때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나를 연기한 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화장을 요란하게 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공격적인 페미니스트였다. 그래서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은 첫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하다가 화장을 지우고 장신구를 빼게 한 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주연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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