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풀러 감독의 전쟁 영화 '지옥의 영웅들'(The Big Red One, 1980년)은 저주 받은 걸작이다.
풀러 감독은 제 2 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던 경험을 살려 영화를 만들었으나, 제작자는 마구잡이로 난도질해 영화를 113분으로 줄여 놓았다.
풀러 감독은 다시 4시간짜리와 2시간짜리 편집본을 다시 제출했으나 제작사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결국 개봉 후 제작사인 로리마는 파산했고, 필름은 워너브라더스 창고로 직행했다.
이를 제작자 겸 평론가인 리차드 쉬클이 발견하고, 필름을 다시 편집해 50분이 늘어난 163분의 재편집본을 내놓았다.
비록 풀러 감독이 다시 편집한 것은 아니지만 2004년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재편집본은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풀러의 진정한 걸작으로 재평가 받았다.
풀러 감독은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 뤽 고다르, 빔 벤더스 같은 유럽 거장들이 존경했고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 장 뤽 고다르는 '미치광이 피에로'에 풀러 감독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풀러 감독은 '미치광이 피에로' 촬영 당시 '영화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영화는 전쟁터 같은 것"이라는 유명한 답변을 남겼다.
인간의 애증, 분노, 연민 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란다.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지옥의 영웅들'이다.
국내 제목은 이상하게 바뀌었지만 원작이 의미하는 '커다란 붉은 숫자 1'은 바로 미 보병 제 1 사단의 사단 마크 겸 상징이다.
보병 1 사단은 미 육군의 상징 같은 존재다.
1917년 원정 1사단으로 창설돼 제 1 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918년 프랑스 전역에서 미군 최초의 승리를 거뒀으며, 제 2 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재편돼 유럽 전선에 최초 파견됐다.
이후 베트남전, 1990년 걸프전, 2003년 이라크전 등에 두루 파병돼며 미국이 치른 대외 전쟁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제 2 차 세계대전때 북아프리카 상륙, 시실리 상륙, 노르만디 상륙작전, 발지대전투 등 유럽의 굵직한 주요 전장을 모두 누볐다.
풀러 감독도 보병 1사단의 일원으로 제 2 차 세계대전을 치렀으며, 16mm 카메라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그의 참전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어 아주 사실적이다.
땅을 파고 숨어 있는 미군 병사들 머리 위로 독일군의 수 많은 탱크들이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고, 아랍 병사들이 독일군의 귀를 잘라 미군에게 파는 에피소드 등은 모두 감독의 경험에서 나온 실제 이야기들이다.
더불어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비정한 방갈로어폭약 설치장면이나 해변에서 내장을 드러낸 채 숨진 병사들의 모습 등 냉혹할 정도로 사실적인 영상은 훗날 '라이언일병 구하기'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무조건 총질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전투와 전투 사이에 막간 휴식 같은 병사들의 모습 및 지역 주민들과 어울리는 풍경 등이 자주 나온다.
언뜻보면 전쟁 영화에 저런 장면들이 왜 필요할까 싶지만 풀러 감독은 전쟁을 기다림의 연속으로 봤다.
그는 참전 경험을 되짚어 "실제 전쟁에서 전투 시간은 10%에 불과하며 나머지 90%는 지루하게 보내는 시간들"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이처럼 무의미한 시간 낭비로 이어지는 살육과 고통, 공포 등 전쟁의 무자비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무엇보다 그는 여성과 아이들을 자주 등장시켜 전쟁이 참전 군인들 뿐만 아니라 미망인과 고아를 만들어 여성과 아이들에게도 끔찍한 희생을 강요하는 점을 지적했다.
그만큼 반전 메시지가 강한 이 작품은 새뮤얼 풀러 감독을 다시 보게 만드는 수작이다.
더불어 촬영 당시 54세였던 리 마빈이 하사관을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많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를 포함해 마크 해밀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1.66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화질은 장면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아무래도 재편집판이어서 뒤늦게 찾아낸 영상들은 지글거림도 심하고 화질이 좋지 않다.
그래도 분량이 대폭 늘어난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타이틀이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으로 제작자 리차드 쉬클의 음성해설 등이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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