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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블루레이)

울프팩 2020. 6. 25. 00:13

무려 2,700여 곡을 작곡하고 이미자, 남진, 패티김, 문주란 등 수많은 가수들의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 박춘석이 2010년 3월 18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영결식장에서 조용히 흘러나온 노래가 있다.

 

패티김이 무반주로 흐느끼며 부른 '초우'다.

본명이 김혜자인 패티김은 원래 판소리로 데뷔했다.

 

1956년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상을 타며 데뷔한 패티김은 신중현 등 당시 많은 대중음악가들처럼 1959년 미 8군 무대에서 대중 가수로 첫 선을 보였다.

당시 인기 있던 미국의 팝 가수 패티 페이지처럼 되고 싶은 생각에 예명을 패티김으로 지었다.

 

패티김과 '초우'

작곡가 박춘석은 우렁찬 성량과 넓은 음폭으로 미국 팝송과 유럽 샹송들을 성악가처럼 부른 패티김을 눈여겨보고 팝송 번안곡들을 취입한 첫 음반을 내도록 권유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도 패티김을 주목했다.

 

일본 빅밴드 스타더스트의 보컬리스트로 초청받아 무대에 섰고 미국의 쇼 기획자들도 그를 불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패티김은 1963년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했다.

 

그때 작곡가 박춘석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건넸다.

'초우'였다.

 

그렇게 패티김은 미국으로 가기 직전 테이프에 '초우'를 녹음했다.

박춘석은 패티김이 미국으로 떠난 뒤 이 노래 테이프를 방송국에 돌렸다.

 

이를 들은 방송 관계자들이 이 노래를 라디오에서 틀면서 크게 히트했다.

정작 노래를 부른 가수가 국내에 없다 보니 패티김은 졸지에 얼굴 없는 가수로 유명인이 됐다.

 

그 사이 패티김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도 하고 NBC TV 투나잇 쇼에도 출연했지만 생각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패티김은 실의와 어머니의 병환이 겹쳐 1966년 귀국했다.

 

패티김은 귀국 당시 공항에 몰려든 많은 사람을 보고 인기를 실감해 국내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해 '진주조개잡이' '썸머타임' '태양이 뜨거울 때' 등이 실린 음반을 발표했다.

 

신성일과 문희의 '초우'

이런 와중에 영화 관계자들이 노래의 인기를 눈여겨보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작품이 바로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년)다.

 

당시뿐만 아니라 1980, 90년대까지 인기 가요들은 곧잘 영화로 제작됐다.

정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일의 인기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신성일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서 부잣집 여성을 꼬셔 팔자를 고쳐 보려는 허황된 자동차 정비공을 연기했다.

헛된 꿈만 좇는 그가 주 프랑스 대사의 딸로 잘못 알고 만난 여성이 식모(문희)였다.

 

신인이었던 문희는 이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어 이후 남정임, 윤정희와 함께 1960년대 우리 영화의 트로이카 여배우로 등극했다.

문희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건강미가 넘쳤다.

 

이후 문희는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서울경제신문을 잇따라 창간하며 한국일보 그룹을 만든 장기영 부총리의 큰 아들 장강재와 결혼하며 은퇴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문희는 물론이고 정진우 감독과 우리 영화계에 중요한 작품이다.

 

허세와 가짜가 판치는 5.16 쿠데타 후 시대상을 담은 영화

이 작품은 당시 성공을 꿈꾸는 청춘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속에 판치는 가짜들이다.

 

"연탄이 가짜에요, 요즘 세상에는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한다니까"라는 세탁소 여주인의 푸념 같은 대사가 상징하듯 남녀 주인공들은 부잣집 아들과 대사의 딸이라는 가짜 신분을 앞세워 신분 상승의 꿈을 꾼다.

청년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차를 훔쳐 타고 나오고 동료를 운전기사처럼 속이며 허세를 부린다.

 

식모인 여성은 주인집에서 선물로 준 비옷을 입고 이름도 잘 모르는 서양 음악가를 거론하며 실제 모습을 감춘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영화 곳곳에는 허세가 가득하다.

양복점과 세탁소는 허세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옷을 빌려주고, 서울 명동의 뮤직홀에는 할 일 없이 배회하면서 음악에 몸을 맡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또 서울 장충동 한복판에 있는 주 프랑스 대사의 집 마당에는 유럽 전원주택처럼 거위들이 거닌다.

왜 마당에 시골에서조차 보기 드물었던 거위를 키우는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나 당시 시대상은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의 어둡고 불안하며 반항적인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한쪽에서는 정체를 속이는 남녀 주인공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분상승의 욕구로 분출됐고 다른 쪽에서는 음악과 춤에 몸을 맡긴 채 세상과 떨어져 사는 뮤직홀 젊은이들의 세기말적 퇴폐 분위기로 흘렀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속 여성의 모습

정작 정체가 드러난 뒤 주인공 남녀의 반응 속에도 이런 시대상이 들어 있다.

남자는 오히려 여성을 심하게 때리고 육체를 탐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낸 반면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자신을 허락하며 슬픔과 후회가 뒤섞인 눈물을 흘린다.

 

허황된 꿈이 허물어진 이유를 남자는 외부에서 찾으며 여자를 탓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당시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미덕으로 꼽히던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다.

 

이처럼 권위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사회 전반에 군사 문화가 폭압적으로 작용하며 더한층 강화됐다.

그것이 1960~80년대 군사 문화가 지배했던 우리 사회에서 멜로 영화 속 여성의 모습이 청순가련 아니면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뻔한 멜로 영화라고 치부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 이런 요소들이 반영돼 있다 보니 당시 사람들의 공감을 사서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시대상을 감안하고 보면 작품이 달리 보인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영상도 눈길을 끈다.

정 감독은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처럼 길거리 촬영을 통해 현실적인 풍경을 담았고 부감과 다양한 앵글 전환, 독특한 인서트 컷을 통해 영상의 변화를 시도했다.

 

때로는 그런 장면들이 의미 없이 의식의 흐름을 좇는 것처럼 전위적으로 보이며 어색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 또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대의 멋이라고 생각한다.

 

문주란의 '초우'

여기에 박춘석이 담당한 음악과 처연하게 깔리는 패티김의 주제가 '초우'를 빼놓을 수 없다.

주인집으로부터 받은 비옷 때문에 인연이 시작돼 비 오는 날만 만나는 남녀 주인공의 모습은 노랫말과 잘 어울린다.

 

개인적으로는 패티김보다 문주란이 1968년에 부른 '초우'를 더 좋아한다.

패티김의 노래가 진폭이 더 크다면 문주란의 노래는 특유의 낮은 저음으로 읊조리듯 불러 가사의 비련미를 더 잘 살렸다.

 

한마디로 패티김의 노래가 드라마틱하다면 문주란의 노래는 낮은 독백처럼 다가온다.

그만큼 두 가수의 노래가 각기 개성이 강하고 맛이 다르다.

 

1080p 풀 HD의 16 대 9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놀랍도록 깨끗하다.

제작연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작품은 무려 50년이 넘는 영화다.

 

그런데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35밀리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복원한 영상은 잡티나 스크래치 하나 없이 깔끔하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필름 손상 흔적이 일부 보이고 오디오가 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화질이다.

 

새삼 한국영상자료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음향은 LPCM 모노를 지원한다.

 

후시 녹음의 특성상 대사 전달이 잘 되는 편이지만 시대상이 반영된 어휘 등이 있어서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자막을 켜고 보는 것을 추천한다.

부록으로 정 감독과 김형석 평론가의 해설, 디지털 복원 전후 비교 영상 등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주 프랑스 대사의 부인을 연기한 배우는 서라벌예전 출신의 천선녀다.
잔디를 깐 서울 장충동 양옥집 마당에 생뚱맞게 거위가 뛰어다닌다. 이 또한 영화적 허세로 보인다. 주 프랑스 대사의 집으로 나온 곳은 자유당 시절 정부의 고위관료였던 사람의 집이다.
정 감독은 이 영화를 "파격적인 실험영화"라고 회고했다. 그는 지금도 '초우'를 휴대폰 컬러링으로 사용한다.
서울 명동 시공관 앞에서 촬영한 장면. 영화는 전체적으로 문희의 내레이션 위주로 흘러간다. 출연 당시 문희는 19세 신인배우였다. 이만희 감독 소개로 문희를 알게 된 정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그를 정해놓고 대본을 썼다.
서울 명동 뮤직홀 장면은 세트다. 정 감독은 28세때 이 작품을 연출했다.
신성일이 연기한 반항적이고 헛된 꿈에 젖어사는 청년의 모습은 프랑스 영화 '네멋대로 해라'에 나오는 장 폴 벨몽도를 연상케 한다. 신성일과 감독은 절친이었다. 자동차 정비소 주인역할은 연극배우 출신 김칠성이 연기.
'맨발의 청춘'에서 짝을 이뤘던 트위스트 김이 이 작품에도 등장. 2010년 세상을 떠난 그는 신성일보다 후배지만 나이는 위였다.
청년과 놀아나는 부자 유한마담을 연기한 전계현.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서 부인으로 나온 그도 서라벌예전 출신 배우다. 그는 2019년 12월20일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2010년 세상을 떠난 유명한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다.
정 감독은 이 작품을 "스토리보다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을 영상으로 전달하는 영화"를 지향했다.
양복점 주인은 정 감독 영화에 모두 출연한 배우 추봉이 연기했다.
지금과 너무 다른 1960년대 서울시청 앞 모습. 지금 시청광장은 분수를 중심으로 차량들이 돌아나가는 로터리였다.  로터리를 광장으로 바꾼다고했을때 교통이 밀린다며 반대가 많았다.
멀리 제비표시멘트 간판이 보이는 무교동 거리는 지금 고층건물들이 들어섰다. 이 장면은 실제 비오는 날 찍었다.
신성일 뒤로 보이는 덕수궁 대한문 일대 풍경도 고층건물이 거의 없어 휑하니 낯설다. 신성일이 극중에서 극동흥업 사장 아들이라고 속이는데, 극동흥업은 이 영화 제작사다.
차량 뒤로 보이는 풍경은 지금 더 플라자 호텔이 있는 거리다. 성우 이창환이 신성일 목소리를 대신 녹음했다. 최무룡 목소리도 대신 녹음한 그는 신성일 목소리를 가장 많이 더빙한 성우다.
경기도 남양주의 마석고개에서 촬영한 장면. 옛날 영화답게 장면 전환에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이 빈번하게 쓰였다.
트럭 운전사로 정진우 감독이 카메오 출연했다. 작품의 원안은 정 감독과 송장배가 썼다.
손빨래하고 연탄을 피워 세탁물을 삶았던 당시 세탁소 모습. 세탁소 여주인은 배우 김정옥이 연기.
당시 길거리 촬영은 사람들 통제가 안됐다. 경찰의 협조를 받을수도 없어서 그냥 행인들 속에서 영화를 찍었다. 여러 장면에서 촬영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당포 주인을 연기한 배우는 유명한 코미디언 양훈씨다. 양석천과 함께 뚱뚱이와 홀쭉이로 활약한 그는 1998년 고인이 됐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촬영. 물 흐르는 바닥을 파내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찍었다.
정 감독에 따르면 운전석을 향한 촬영은 촬영감독이 차량 본네트 위에 엎드려 몸을 묶고 달리며 찍었다고 한다.
놀이공원 장면은 장소가 명확하지 않지만 지금은 창경궁으로 이름이 바뀐 창경원처럼 보인다. 어려서 가본 창경원은 당시 놀이시설이 있던 동물원이었다.
지금은 댐 때문에 수몰된 팔당에서 촬영한 장면. 지금 들으면 어색한 신파조 대사가 많이 나온다.
왜 이런 기이한 자세로 쳐다볼까.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 이 당시 영화 속에서 흔히 보이는 풍습 중 하나가 서양영화의 약칭처럼 이름을 외자로 부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영희를 '영'으로 부른다.
영화속 우산과 의상을 앙드레김이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앙드레김이 처음으로 영화 의상을 제작한 영화다.
1938년생인 정진우 감독은 중앙대 법학과를 나왔으나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선배였던 배우 최무룡과 인연을 맺어 영화판에 발을 디뎠다.
팔당에서 촬영한 장면. 정 감독은 유현목 감독과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고 25세때 '외아들'로 감독 데뷔했다.
당시 극장 입장료가 66원이던 시절 이 영화 제작비는 430만원이었다. 개봉 후 10만명의 관객이 들어 제작비를 뽑았다.
정 감독은 이 장면을 서오릉에서 찍었다고 밝혔다. 신성일이 나오는 장면은 고종과 민비를 합장한 남양주 홍릉에서 찍었다.
막판 청년이 강도짓을 벌이는 장면은 '네멋대로 해라'를 닮았다. 이 장면은 서울시민회관 앞 광장,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찍었다. 모인 군중은 엑스트라가 아닌 실제 행인들이다.
음향은 17.5밀리 사운드 네거티브 필름의 모노 음향을 잡음 제거 후 부드럽게 복원했다.
여성을 마구 때린 뒤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은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지만 요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폭력적이다.
물레방앗간처럼 보이는 허름한 농가의 정사 장면은 검열에서 많이 잘렸다.
이 장면은 또렷하게 보이지만 여러 장면에서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인다.

 
 
꽃이 있는 식탁
고은경 저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초우 (1Disc) : 블루레이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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