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황정민 23

여자, 정혜

이윤기 감독의 작품은 호흡이 긴 유럽 영화에 가깝다. '멋진 하루'도 그렇지만 그의 장편 데뷔작인 '여자, 정혜'(2005년)는 더더욱 찬찬한 시선의 영상이 긴 호흡으로 펼쳐진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여자 정혜(김지수)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는 숏과 숏 사이를 긴 침묵이 메우고 있다. 주인공 정혜의 차분한 시선으로 풍경과 사물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영상은 그만큼 할리우드 스타일의 빠른 커트에 익숙해 있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화려한 볼거리도 없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불쑥 카메라를 들이댄 것 처럼 무심한 영상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그만큼 세심한 표정연기가 필요해 배우들이 연기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연기가 아닌 것 처럼 가장하는 연기가 가장 힘들..

댄싱 퀸

이석훈 감독의 '댄싱 퀸'(2012년)은 CJ 계열사들이 공동으로 추진한 비즈니스 프로젝트 같은 영화다. CJ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을 맡아 엠넷의 슈퍼스타K를 최대한 활용해 촬영한 뒤 CGV에서 집중 상영했다. 어찌보면 CJ그룹의 엔터테인먼트 파워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CF 같다. 그렇게 조합한 설정이 관객을 자연스럽게 영화에 빠지도록 하는 것을 보면, 성공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관객을 끌어들이는 비결은 그럴 듯하면서도 이색적인 설정 때문이다. 인권 변호사가 시장 후보로 나서고 그의 아내인 주부가 오디션 프로에 도전해 가수가 되는 설정 등은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고 대박을 꿈꾸는 오디션에 열광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했다. 여기 담긴 나이 상관없이 언제라도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하라는 메시지는 진부하지만 ..

영화 2012.01.22

부당거래 (블루레이)

오늘 신임 권재진 법무장관과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가 내정됐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경찰보다 한 수 위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검찰이 일부이긴 하지만 수사권을 내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검찰 내부에서는 경찰에 밀렸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그만큼 양 측의 해묵은 갈등은 쉽게 해결되기 힘든 과제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2010년)는 요즘 검경의 암투를 보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검찰, 경찰, 언론 등 소위 권력의 부정부패를 다뤘다. 공교롭게 지난해 터진 스폰서 검사 사건처럼 자본의 비호를 받는 검찰, 폭력조직과 유착해 없는 범인을 날조하는 경찰, 뇌물을 받고 한쪽에 치우친 기사를 쓰는 언론 등 썩은 내가 진동하는 세계를 ..

그림자 살인

탐정물의 재미는 수수께끼 풀이와 일맥 상통한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뇌 플레이는 곧 제작진과 관객의 싸움이다. 한국의 탐정물을 표방한 박대민 감독의 '그림자 살인'은 그런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연쇄살인의 비밀을 푸는 탐정(황정민)과 그 일행(류덕환, 엄지원)의 활약을 다룬 스토리는 치밀했지만 관객과의 게임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선이 적절하게 스며들어간 이야기는 나름대로 탄탄해서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종반으로 치달을 수록 사건의 해결 과정이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한다. 이유는 한가지, 추리극의 기본 원칙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추리극은 초반에 제시된 인물들 속에서 범인이 등장하는 것을 불문율로 하고 있다. 결코 독자..

영화 2009.04.11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을 보면 요즘 한국영화를 참 잘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쌍의 각기 다른 사랑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구성이 '러브 액츄얼리'와 흡사해 감점 요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 현실에 맞는 사랑, 즉 사람들의 애환이 적절히 녹아든 생활 이야기로 '러브 액츄얼리'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특히 형식상 많은 인물과 여러 이야기가 섞이다 보면 혼선을 빚을 법도 한데 연결고리에 신경을 써서 적절한 편집으로 이야기를 잘 정리했다. 영화를 보면 민 감독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시선이 따뜻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 역시 소외받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는다. 현재의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