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는 유독 관객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범상치 않은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이 작품은 유독 정도가 심하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다양성 차원에서 파격적인 발상이 돋보이는 김 감독의 작품들을 아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보기 힘들었다.
잔혹하고 야한 장면 때문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장면들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잔혹극에 가까운 고통이다.
내용은 어느 가정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사건이다.
남편의 외도 때문에 아내가 아들에게 몹쓸 짓을 벌이고 집을 나간다.
이후 남편은 아들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해결이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또다른 갈등을 낳고 결국은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비명과 신음 소리 외에는 일체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무성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배우들의 행동으로만 이야기가 흘러간다.
일단 독특한 구성이어서 눈길이 가지만 굳이 대사를 배제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화목한 가족이란 것이 결국은 소통에서 오는 것인데, 어찌보면 소통의 부재를 통해 화목하지 못한 가족을 그리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지나친 형식의 과잉으로 보여 불편하다.
불편한 것은 대사의 부재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성적인 요소에서 원인과 해결을 찾는 점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조리의 시작과 끝을 성기에서 찾은 감독은 불편할 정도로 근친상간과 잔혹한 장면으로 채웠다.
결국 제목이 의미하는 뫼비우스는 남편과 아들로 이어지는 성기의 동질성인 셈이다.
하지만 욕망의 근원 또한 성기로만 해석한 장면들은 지나치게 프로이트적이다.
그렇다보니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 못하고 거세 공포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통한 가정의 파탄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김 감독도 이를 알고 있기에 파국적 결말이라는 외통수로 나아간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고통과 쾌락이 합일을 이루는 지점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다.
영화 속에서는 고통이 쾌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열락의 기쁨을 느끼는 장면은 등장인물들에게는 쾌락일 수 있지만 관객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고통이다.
결국 관객 입장에서는 결코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작품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욕망의 유물론을 다룬 영화다.
고유가치를 뛰어넘는 잉여쾌락 때문에 끝없는 욕망을 추구한다고 본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처럼 영화는 잉여쾌락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어차피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 감독의 생각대로 만드는 점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한 점이나 작위적인 내용들을 보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너무 흥분하지 말라"는 지젝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범상치 않은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이 작품은 유독 정도가 심하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다양성 차원에서 파격적인 발상이 돋보이는 김 감독의 작품들을 아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보기 힘들었다.
잔혹하고 야한 장면 때문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장면들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잔혹극에 가까운 고통이다.
내용은 어느 가정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사건이다.
남편의 외도 때문에 아내가 아들에게 몹쓸 짓을 벌이고 집을 나간다.
이후 남편은 아들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해결이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또다른 갈등을 낳고 결국은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비명과 신음 소리 외에는 일체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무성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배우들의 행동으로만 이야기가 흘러간다.
일단 독특한 구성이어서 눈길이 가지만 굳이 대사를 배제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화목한 가족이란 것이 결국은 소통에서 오는 것인데, 어찌보면 소통의 부재를 통해 화목하지 못한 가족을 그리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지나친 형식의 과잉으로 보여 불편하다.
불편한 것은 대사의 부재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성적인 요소에서 원인과 해결을 찾는 점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조리의 시작과 끝을 성기에서 찾은 감독은 불편할 정도로 근친상간과 잔혹한 장면으로 채웠다.
결국 제목이 의미하는 뫼비우스는 남편과 아들로 이어지는 성기의 동질성인 셈이다.
하지만 욕망의 근원 또한 성기로만 해석한 장면들은 지나치게 프로이트적이다.
그렇다보니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 못하고 거세 공포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통한 가정의 파탄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김 감독도 이를 알고 있기에 파국적 결말이라는 외통수로 나아간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고통과 쾌락이 합일을 이루는 지점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다.
영화 속에서는 고통이 쾌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열락의 기쁨을 느끼는 장면은 등장인물들에게는 쾌락일 수 있지만 관객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고통이다.
결국 관객 입장에서는 결코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작품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욕망의 유물론을 다룬 영화다.
고유가치를 뛰어넘는 잉여쾌락 때문에 끝없는 욕망을 추구한다고 본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처럼 영화는 잉여쾌락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어차피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 감독의 생각대로 만드는 점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한 점이나 작위적인 내용들을 보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너무 흥분하지 말라"는 지젝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