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풍경들을 고스란히 보여줘 좋다.
내용을 떠나 그때 그 모습을 타임머신 타고 돌아간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도 민간의 사관처럼 역사를 기록하는 증거물인 셈이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은 한창 서울 강남의 개발 붐이 일던 1970년대 말 8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는 순간 밭농사 짓던 촌동네가 어느 날 개발 붐을 타고 부촌이 돼 버렸다.
덕분에 돈을 번 사람도 있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내몰린 사람도 있다.
영화는 이렇게 희비가 엇갈린 사람들을 다뤘다.
부동산 개발 붐을 타고 돈을 버는 악덕 부동산업자와 무작정 잘 살아보겠다고 몸뚱이 하나로 상경한 무지렁이 청춘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서울로 몰려든 젊은이들은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 된다.
돈벌이에 밝은 사람들은 이를 그냥 놔두지 않고 적절하게 이용한다.
젊은이들은 피눈물을 흘려도 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힘든 오늘을 견딜 뿐이다.
최일남의 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개발 붐이 일던 강남의 풍경과 당시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의 고달픈 삶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과 너무도 다른 1980년 서울의 모습이다.
오래된 아파트 외에 고층 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서울 응봉동 언덕과 길동 사거리,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강남의 비포장길과 그 위로 달리는 포니, 마치 시골 고분 같은 선정릉 모습 등이 당시 서울 풍경이다.
여기에 이은하의 '밤차', 진미령의 '하얀 민들레', 이럽션의 'One Way Ticket' 등 흘러간 노래들이 옛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든다.
더불어 지금은 유명 스타인 안성기, 최불암, 유지인, 임예진, 김희라, 김보연 등의 싱그러운 모습과 이제는 고인이 된 김성찬, 김영애, 김인문 등 반가운 얼굴도 등장한다.
당시 안성기는 거의 무명 배우였다.
오히려 김성찬이 더 유명했다.
안성기는 아역 배우 일을 하다가 한동안 영화판을 떠나 있어서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장호 감독도 마찬가지.
그는 '별들의 고향'을 만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나 1976년 연예인들의 대마초 사건 때 구속돼 무기한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를 구해준 것은 10.26 사건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죽은 뒤 활동 정지 처분이 풀려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됐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이 영화다.
물론 작업이 순탄치 않았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봉된 작품이라 검열의 칼 끝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다행히 박정희 정권의 개발 우선 정책의 부작용을 다룬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큰 문제없이 개봉했다.
물론 검열로 사소한 삭제가 있기는 했지만 내용이 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흥행 성적은 10만 명.
100만 영화가 없던 시절이니 괜찮은 성적이다.
요즘으로 치면 300만~400만은 든 셈이다.
덕분에 이 감독은 훌륭하게 재기해 여러 작품들을 만들게 됐다.
힘든 시기를 겪어서 그런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이 감독의 비판적 시각과 문제의식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영화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 복원이 잘 됐다.
매끄러운 윤곽선을 자랑하는 영상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색감도 괜찮은 편.
음향은 LPCM 모노를 지원한다.
부록으로 이장호 감독과 김홍준 감독의 음성해설, 디지털 복원 전후 비교, 우리나라 감독들의 좋아하는 우리 영화를 소개한 '나의 사랑 나의 영화', 예고편 등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초반 교회 장면은 길동 사거리의 천호동 교회에서 찍었다.
중국집 배달부로 나온 안성기가 개 때문에 겁을 먹은 장면은 부자 동네였던 방배동에서 촬영.
지금은 보기 힘든 현대의 포니와 폭스바겐의 비틀.
세 주인공을 연기한 안성기, 김성찬, 이영호. 안성기는 중국집 배달부, 김성찬은 여관 종업원, 이영호는 이발소 종업원으로 등장.
서울 응봉동의 응봉산에서 찍은 장면. 뒤에 보이는 오래된 아파트들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김성찬이 미장원 종업원으로 나온 조주미와 데이트하는 장면은 서울 선정릉, 즉 강남의 선릉에서 촬영했다. 조주미는 당시 연극배우였다.
당시 정윤희, 장미희와 함께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린 대스타였던 유지인이 여주인공으로 등장.
이 작품은 1980년 11월 27일 서울 명보극장에서 단관 개봉했다. 원래 안성기 목소리는 성우 최응찬과 배한성 등이 녹음해 봤는데 어울리지 않아 배한성의 권고로 안성기가 직접 후시녹음했다.
대배우 김승호의 아들인 김희라와 박원숙이 불륜 커플로 등장.
이발소 면도사로 나온 김보연. 당시 이발소는 면도도 해주고 머리를 감겨주는 여성 면도사가 있었다.
유명한 음향효과 전문가인 김벌레가 카메오 출연. 온갖 소리를 만들어내 유명했던 그는 올해 5월 타계했다.
중국집 장면은 길동에 있던 실제 중국집에서 촬영. 중국집 주방장으로 나온 백송은 1950년대부터 활동한 원로 배우다.
포장마차 부부로 나온 김인문과 김영애. 모두 고인이 됐다. 김영애는 이 감독이 '별들의 고향'에 여주인공으로 점찍은 배우였다. 그러나 제작자 반대로 무산됐다.
풋풋한 모습의 임예진. 원래 최일남 원작 소설의 주인공은 사시(斜視) 청년이다. 이 감독은 실제 사시 청년을 쓰려고 공개 모집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때 배창호 조감독 소개로 안성기를 섭외했다.
양수리의 두물머리에서 촬영. 조감독이었던 배창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처음 영화 작업을 했다.
디스코테크 장면은 이태원에서 촬영. 이를 위해 안성기는 두 달간 무용학원에서 농악 춤을 배웠다.
최불암이 악덕 부동산 개발업자로 등장. 대본은 송기원 시인이 썼으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 반정부 음모로 구속돼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장호 각본으로 올라갔다.
땅을 빼앗긴 강남 노인은 1940~50년대 주, 조연을 많이 한 원로 배우 이향씨가 연기. 그를 업은 남성은 소리꾼 임진택이다.
이 감독의 막내 동생인 이영호는 망막색소 변성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활동을 중단했다. 이 감독이 좋아한 김성찬은 1999년 KBS의 '도전 지구탐험대' 촬영차 태국에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촬영은 고인이 된 서정민 촬영감독이 담당. 그는 이 감독과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무릎과 무릎 사이' 등 여러 편을 찍었다. 그는 '몽정기' '수취인 불명' '어린 신부' '여고괴담' 등 160여 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이 감독이 카메오 출연. 당시 배우들은 의상을 모두 직접 구해왔다.
가운데 모자를 쓴 노인이 이 감독의 아버지다. 그는 배우를 꿈꾸다가 하지 못하고 미 군정시절 영화 검열관을 했다. 영화계를 잘 알았던 그는 아들을 신상옥 감독에게 소개해 영화판에 발을 디디게 했다.
실제 미장원에서 촬영. 음악은 가수 김도향이 담당. 김도향도 1970년대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을 못했다.
실제 공사 중이던 포클레인을 즉석에서 섭외해 촬영. 포클레인 기사가 긴장해 수도관을 터뜨리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영화에 나온다.
군대 가기 전 김성찬이 술에 취해 구전가요를 부르는 장면에서 일부 가사가 검열로 삭제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문공부는 '순자를 부를까나'라는 가사를 무조건 삭제하라고 했다.
서울 용산역에서 촬영. 기차를 빌릴 수 없어서 5분간 정차해 있는 동안 찍었다. 김성찬은 이날 지각을 해서 이 감독에게 여러 번 맞았다고 한다.
권투 체육관 장면은 고인이 된 김덕팔 선수가 훈련하던 화양리 체육관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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