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이키루

울프팩 2013. 6. 26. 16:53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1952년)는 아버지의 모자에 대한 이야기다.
도쿄시청 공무원인 주인공은 평생 써 온 모자처럼 30년 공무원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가지 일만 되풀이 해왔다.

무사안일로 타 부서에 일을 떠넘기고 자리 보전에만 급급한 자세로 살았던 그가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위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시한부 6개월.
그제사 주인공은 이렇다 한 일 없이 보낸 자신의 30년 인생이 덧없음을 깨닫는다.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까.
메피스토펠레스의 꾐에 빠진 파우스트처럼 평소 해보지 못한 유흥에 빠져 보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말단 여직원의 말에 불현듯 깨닫는다.
그때부터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은 가난한 동네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붙인다.

이 작품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치고는 드물게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다뤘다.
특히 '주정뱅이 천사'(http://wolfpack.tistory.com/entry/주정뱅이-천사)처럼 한 사람이 사회를 바꾸는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영화는 주인공이 모자를 바꾸기 전과 후로 나뉜다.
위암 판정을 받기 전에 썼던 낡은 모자는 30년 동안 변함없는 자세로 일관한 의미없는 삶을 뜻한다.

위암 판정 이후 새로 구입한 모자는 그의 달라진 삶을 의미한다.
아키라 감독은 직설적인 대사와 상징적 은유가 배어있는 소품을 통해 당시 일본 사회에 퍼져있던 문제점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특히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무기력한 일본 사회의 모습을 무사안일에 젖어있는 공무원들의 모습을 통해 적나라하게 다뤘다.
관료는 무기력하고 국민들은 소위 1920년대 미국 재즈시대처럼 파친코와 술, 춤 등 현실도피를 위한 향락에 빠져 있다.

이런 시점에 영화 속 주인공은 팔을 걷어 붙이고 다시 해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사회비판적이며 사회참여적인 작품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듯, 한 작품이 사회에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명작이다.
"불행에도 멋진 단면이 있다. 불행은 인간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위암은 당신에게 인생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영화 속 대사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4 대 3 풀스크린의 흑백영화인 이 작품은 화질이 좋지는 않다.
무려 61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봐야 할 듯.

그렇다고 명작이 갖고 있는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모노를 지원하며 부록은 전혀 없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30년 무사안일로 일관한 공무원을 연기한 시무라 다케시. 제목 이키루는 삶이라는 뜻.
우리 아버지들도 저랬다. 잠자리에 들기 전 요 밑에 바지를 넣고 자면 아침에 구김이 펴졌다. 주인공이 자리를 정돈하고 누운 뒤 이불을 들쓰고 우는 장면은 가슴이 아리다.
암 선고 후 주인공이 술집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뱃노래는 1915년에 작곡됐다.
시민들은 민원을 하러 왔다가 다른 부서에 떠넘기기에 급급한 공무원들을 보고 "월급 도둑놈아"라고 소리친다.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듯 싶다.
영화의 전반부가 주인공의 관점에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회고로 이어진다. 원래 대본 구상 때 주인공은 공무원에 맞서는 야쿠자로 설정됐다가 바뀌었다.
아버지는 죽을 때 까지 하나 뿐인 아들에게 위암을 알리지 않는다. 평생을 바쳐 키운 자식이건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대한 야속함과 슬픔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품인 모자를 받아 들고서야 깊은 뜻을 깨우친다.
정작 이 영화의 묘미는 결말에 있다. 죽은 사람의 헌신에 감동한 공무원들이 새로운 각오를 다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무사안일과 자리보전에서 달라진 게 없다. 여기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통렬한 비판과 풍자, 냉소적인 시각이 그대로 녹아있다.
구로자와 아키라 컬렉션 3DVD (라쇼몽 주정뱅이 천사 이키루)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이키루 (2disc) : 양장판
꽃이 있는 식탁
고은경 저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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