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박해일 11

최종병기 활

허공을 가르는 화살 하나가 이토록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줄 몰랐다. 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은 병자호란때 청에 끌려간 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의 명궁 이야기를 다뤘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의 단조로움을 극복한 것은 스피디한 영상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들이다.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처럼 빠르게 바뀌는 컷과 다채로운 앵글은 잠시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화면은 빠른 액션의 속도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덕분에 잠시도 지루할 틈 없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액션에 빠져들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도 전광석화다. 쉼없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허공을 가르며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는 화살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만큼 영화는 ..

영화 2011.08.13

이끼

강우석 감독의 영화 '이끼'를 보기 전에 윤태호가 그린 원작 만화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 내용을 미리 알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의 그림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원작에 얽매이지 않고 영화를 담백하게 볼 수 있었다. 원작을 배제하고 본 영화는 밀실 추리소설 같은 작품이다. 비록 주인공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다양한 인물과 공간이 등장하지만 사건의 무대는 권력자인 이장이 지배하는 어느 외딴 마을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어느 노인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은 결국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점에서 밀실 추리소설과 다름없다. 그만큼 영화는 한정된 공간, 한정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는 곧 주어진 5장의 패를 들고 승부를 걸어야 하는 포커게임 같다는 소리다. 얼마 되지..

영화 2010.07.17

살인의 추억 (블루레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년)은 우리 영화 중에서 걸작을 몇 편 꼽으라면 꼭 들어갈 작품이다. 탄탄한 내용과 연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훌륭한 영상, 애잔한 음악까지 이토록 완벽한 작품이 있을까 싶다.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와요'를 각색한 이 작품은 그 해 500만명을 넘기며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내용은 1986년부터 91년까지 경기 화성에서 6년간 10명의 부녀자가 죽은 연쇄강간살인사건을 다뤘다. '화성 연쇄 살인'으로 통하는 이 사건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하고 공소 시효를 넘겨 영구 미제 사건이 됐다. 봉 감독은 안개 속처럼 뿌연 사건의 한 가운데서 범인을 쫓는 형사들의 안타까운 심정에 초점을 맞춰 숨막히는 드라마로 그려 냈다. 어찌나 심리 묘사가 탁월한 지 절로 형사들의 심정에 ..

괴물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년)은 다면성을 지닌 작품이다. 한강에 괴물이 산다는 설정만 놓고 보면 공상과학(SF)물이며 재난 영화다. 그렇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가족영화면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끌어가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에게 어린 소녀를 납치당한 가족들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족에 대한 철썩같은 믿음과 사랑 뿐인 평범한 소시민인 이들은 군대도, 경찰도, 심지어 세계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도 못해내는 일에 몸을 던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국가도 해내지 못한 일을 가장 힘없는 소시민이 해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메타포다. 어찌보면 정치 권력과 제도에 대한 항거처럼 보인다. 특히 주한 미군의 독극물 한강 방류, 고엽제를 연상케하는 에이전트 옐로..

질투는 나의 힘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이다. 이 시에서 제목을 딴 박찬옥 감독의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2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똑같은 남자에게 과거의 애인과 현재 마음속에 두고 있는 여인을 빼앗기는 남자의 이야기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연애담 속에 맺어지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비단 연인관계뿐 아니라 연애의 당사자들을 둘러싼 주변사람들과 관계도 놓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언뜻 보면 사건 자체가 황당하고 주변인들과 벌어지는 뜬금없는 이야기들은 박 감독을 '여자 홍상수'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만큼 박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