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년)은 우리 영화 중에서 걸작을 몇 편 꼽으라면 꼭 들어갈 작품이다.
탄탄한 내용과 연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훌륭한 영상, 애잔한 음악까지 이토록 완벽한 작품이 있을까 싶다.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와요'를 각색한 이 작품은 그 해 500만명을 넘기며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내용은 1986년부터 91년까지 경기 화성에서 6년간 10명의 부녀자가 죽은 연쇄강간살인사건을 다뤘다.
'화성 연쇄 살인'으로 통하는 이 사건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하고 공소 시효를 넘겨 영구 미제 사건이 됐다.
봉 감독은 안개 속처럼 뿌연 사건의 한 가운데서 범인을 쫓는 형사들의 안타까운 심정에 초점을 맞춰 숨막히는 드라마로 그려 냈다.
어찌나 심리 묘사가 탁월한 지 절로 형사들의 심정에 공감하며 안타까워 한 기억이 난다.
봉 감독이 뛰어난 점은 몇몇 인간 군상을 통해 80년대 시대상을 함축적으로 녹여낸 점이다.
군사 정권 아래 시위 진압에 내몰린 경찰들은 민생 치안에 소홀할 수 없었고, 그 빈틈을 노린 범인의 손아귀에 힘없는 부녀자만 스러져갔다.
결국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시대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인데도 서정적이기까지 한 영상은 이 작품에 묘한 관조적 슬픔을 불어 넣는다.
음악도 마찬가지.
봉 감독이 직접 골랐다는 장현의 '빗 속의 여인'을 비롯해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이와시로 타로가 만든 오리지널 스코어는 그 애잔함에 가슴이 서늘해 진다.
재미 있으면서 작품성까지 겸비하기 쉽지 않은데, 이 작품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수작이다.
봉준호의 힘이다.
최근 블루레이로 다시 나온 이 작품은 1080p 풀HD 영상의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한다.
화질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미세한 지글거림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내 장면의 세밀함과 블루레이 특유의 놀라운 해상도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쉬운 것은 음향.
DTS HD 7.1 마스터 오디오를 지원하는데, 이를 지원하지 않는 리시버에서는 소리가 약하게 들린다.
부록은 DVD와 동일하다.
봉 감독과 제작진, 배우들의 음성해설 2편, 제작과정, 인터뷰, 삭제장면, 시사회, 특수효과 등이 그대로 수록됐으며, 영화 시작전 블루레이 출시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봉 감독의 짧은 인터뷰가 새로 추가됐다.
<블루레이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화성 연쇄살인은 1986년 9월 71세 노파 살인 사건이 1차였으나, 10월에 발생한 2차 사건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 2차 사건의 희생자인 당시 25세 여성은 농수로에서 사체가 발견됐다. 농수로 사체 장면은 스튜디오 촬영한 뒤 합성.
곳곳에 제작진이 단역으로 출연. 죽은 여인과 맞선 본 총각 역할은 한성근 조감독이 맡았다.
블루레이 해상도가 어찌나 좋은 지 풀HD 프로젝터를 이용해 100인치로 키워도 영상이 깨끗하다.
김상경이 들판을 둘러싼 안개를 뚫고 등장하는 장면은 전북 부안에서 촬영. '지금 자수하지 않으면 너는 사지가 썩어 죽는다'는 섬뜩한 허수아비는 당시 경찰들이 세웠다고 한다.
"저건 노래가 좋아" 송강호의 잊지못할 명대사가 터진 장면. 연주곡인데도 일부러 '노래'라고 표현해 시골형사의 무식함을 드러낸 장면. 빠바바바바밤~ 빠바바바바밤~ 70년대 흑백TV 세대라면 유복성의 타악기 연주와 함께 시작하는 MBC 드라마 '수사반장'의 멜로디를 잊지 못한다.
오디션에서 400명이 넘는 경쟁자를 뚫고 백광호 역으로 발탁된 연극배우 박노식. 얼굴 흉터는 라텍스로 만들어 붙인 것.
논두렁 현장 검증 장면은 48프레임으로 빠르게 찍어 정상 재생해 슬로 모션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 피해자 대역으로 등장하는 백봉기는 훗날 '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
이 작품은 여러 군데를 돌며 촬영. 시멘트 공장이 뒤로 보이는 이곳은 전남 장성이다.
여경 역의 고서희, 여중생 희생자 역의 우고나 모두 오디션으로 선발. 고서희는 '박하사탕'에서 술집 아가씨로 출연했으며, '오아시스'에도 나온다.
스산하게 비가 뿌리는 벌판에 여인이 우산을 받쳐든 채 지아비 마중을 나간다. 어디선가 나즉히 울리는 휘파람 소리가 그 뒤를 밟고, 순간 얼어붙었던 여인이 플래시로 논두렁을 일별한 뒤 이를 악물고 달음박질을 친다. 그때 여인의 심장 소리처럼 북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와시로 타로의 음악은 압권이다.
이와시로 타로는 일부러 제작진이 선택한 일본 음악가다.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의 음악을 맡았던 그는 "범인의 관점에서 작곡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인기몰이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뛰어난 완급 조절이다. 숨 막히는 긴장감 사이 사이로 터지는 웃음이 깔려 있다. 기막힌 타이밍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 그래서 송강호는 봉준호를 가리켜 "천재 감독"이라고 칭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에 동원된 경찰은 무려 180만명. 용의자만 3,000명에 이르지만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다. 봉 감독 말마따나 80년대 국가와 사회적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변태 용의자로 출연한 연극 배우 조병순은 원작 연극인 '날 보러와요'도 출연했다.
취조실로 쓰인 지하 보일러실은 양수리 영화촬영소에 세운 세트다. 보일러도 제작진이 조립한 것. 용의자를 힐끔 돌아보는 보일러 수리기사는 이강산 조명기사가 연기.
이 영화는 황금벌판이 일렁이는 인트로와 엔딩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채색에 가깝다. 암울한 현실 만큼이나 탈색된 영상은 필름 현상시 은 입자를 제거하기 않고 그대로 남겨둬 색이 바래 보이도록 만드는 블리치 바이 패스 기법을 이용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영화와 달리 꼭 비오는 밤에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10건중 5건은 맑은 날에 발생했다. 범인은 가슴을 난자하고 복숭아 조각 등 피해자의 물건을 음부에 집어넣거나 피해자의 옷을 개서 옆에 놔두는 등 이상한 특징을 남겼다.
시골 형사 역의 송강호, 서울서 파견 나온 형사 역의 김상경, 과격한 형사 역의 김뢰하, 반장 역의 송재호 등 수사진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국과수 직원으로 나온 분은 회사 선배인 이대현 한국일보 논설위원. 출연 당시 영화담당 기자였다. 봉 감독은 토니 레인즈가 만든 '장선우 변주곡'에 나오는 이 선배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캐스팅을 결심.
빈 곳 없이 꽉 찬 프레임, 안정된 앵글로 탁월한 그림을 만들어 낸 촬영은 김형구 촬영 감독의 솜씨.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연기한 박해일. 범인은 정액, 머리카락, 음모, 옷가지 등 여러가지 증거를 현장에 남겼지만 당시 과학 수사 능력이 뒤쳐졌던 경찰은 이를 추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10건의 사건 중 8차는 연쇄살인사건을 흉내낸 모방 범죄였고, 유일하게 범인이 잡혔다. 화성 연쇄살인은 여러가지 비극을 낳았다. 수사를 받은 용의자들 가운데 한 명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또다른 중년 용의자는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졌다. 다른 청년 용의자는 27세에 암으로, 또다른 청년 용의자는 목매 자살했다. 다른 용의자는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고, 8차 사건의 범인을 잡은 경찰은 1계급 특진했으나 99년 교통사고로 고인이 됐다.
황금 물결이 일렁이는 인트로와 엔딩은 부안에서 촬영. 송강호는 엔딩에서 금기를 깨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선전 문구가 절절한 울림이 되어 비수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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