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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블루레이)

울프팩 2022. 7. 25. 00:53

중세시대 기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돈키호테'처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이는 이미지다.

리들리 스코트(Ridley Scott) 감독의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The Last Duel, 2021년)'는 1386년 일어난 기사들의 마지막 결투를 다룬 실화다.

 

제목만 보면 액션물 같지만 실제는 치정극을 푸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에릭 재거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카르주 가문의 영주 장(맷 데이먼 Matt Damon)과 그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 Adam Driver) 사이에 벌어진 결투를 다뤘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발단은 장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Jodie Comer)다.

장이 집을 비운 사이 자크가 마르그리트의 미모에 반해 강제로 범했다는 것.

 

하지만 자크는 부정한 여인이 먼저 유혹했다며 화간을 주장했다.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여성들은 강간을 당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강간의 책임을 남성보다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여성의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특히 귀족을 상대로 문제 삼았다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고귀한 귀족의 명예의 흠집을 낸 죄로 여성이 사형을 당했다.

 

설령 목격자가 있어도 귀족을 두려워해서 입을 다물기 때문에 강간죄 입증이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 상황이라면 마르그리트의 강간은 그냥 넘어갔을 일이다.

 

그런데 마르그리트는 짐승 같은 취급을 당한 모욕과 분노를 참지 않았다.

그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남편 장뿐이었다.

 

마르그리트는 남편에게 강간 사실을 알리고 영주, 나중에 프랑스 왕에게까지 재판을 청구했다.

이제 공은 장에게로 넘어갔다.

 

왜냐하면 아내가 강간당한 것은 남편의 재산권 침해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세 유럽에서 여성은 가축과 동일한 남편의 재산일 뿐이었다.

 

따라서 강간죄는 아예 없었고 남편의 재산권 침해에 해당했다.

남편은 재판 결과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피의자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여야 했다.

 

중요한 것은 결투에서 이겨 살아남는 자가 곧 승소하는 것이다.

즉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결투의 결과가 진실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생존은 곧 진실이다.

남편 장이 이기면 귀족을 강간범으로 몰아 명예를 떨어뜨린 죄로 화형 당할 위기에 처한 아내의 목숨까지 구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나, 반대로 자크가 이기면 결투에서 죽는 장뿐만 아니라 아내 마르그리트도 화형 당해 부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강간을 당했다는 마르그리트와 화간을 주장하는 자크의 상반된 얘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라쇼몽 같은 챕터식 구성

스코트 감독은 사건 당사자인 마르그리트, 장, 자크 세 사람의 관점에서 각자의 주장을 3개의 챕터로 구분해 보여준다.

같은 사건이 세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전개되며 마치 추리 소설처럼 진실을 유추하게 된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되풀이해 보여주는 방식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연상케 한다.

이야기가 세 번 되풀이되며 조금씩 달라지는 내용에 따라 수수께끼를 풀도록 만든 과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특히 스코트 감독은 3개의 챕터를 통해 여성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중세 시대 재판 과정 등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판에 나선 사람들은 출발부터 귀족인 남성의 편에 서서 여인에게 "강간당하며 즐거움을 느꼈냐" "부정한 임신을 숨기려고 강간을 이용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때 무서운 것은 재판에 나선 사람들보다 아무런 감정 동요 없이 무표정하게 여인을 바라보는 청중들이다.

결코 약자에 공감하지 못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 마르그리트의 힘든 처지와 당시 여성들의 입지가 더욱 부각된다.

 

귀족의 아내도 이럴진대 평민이나 천민 여성들의 처지는 어떠했을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압권은 막판 결투 장면이다.

 

시대극의 달인인 스코트 감독은 두 사람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벌이는 투박한 전투를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긴장감 넘치게 묘사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창과 칼이 맞부딪치며 사방에 피가 튀는 장면을 때로는 바짝 붙어 찍거나 때로는 멀리 떨어져 전체 모습을 보여주고, 때로는 느린 속도로 재현하며 처절한 순간을 과격하게 강조했다.

 

그만큼 스코트 감독은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등 과거 작품들에서 보여준 전투 장면의 극적인 묘사 능력을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결투의 결과는 결코 개운하지 않다.

 

재판이 힘의 논리에 따라 좌우되면서 결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됐다.

남자들이 명예와 욕심을 위해 여인을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여인이 부정을 감추려고 남자들의 명예욕을 이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결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도 승자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종교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스코트 감독 특유의 무신론적인 시각도 짙게 배어 있다.

 

미스터리한 챕터식 구성과 긴장감 넘치는 연출, 시대상을 잘 살린 소품과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 오래된 풍경화를 보는 듯한 그림 같은 촬영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꽤 잘 만든 수작 드라마다.

무엇보다 14세기의 아픈 시대상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같은 울림을 준다.

 

1080p 풀 HD의 2.39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유화처럼 부드러운 색감과 깔끔한 윤곽선, 어두운 실내조명이 자연스럽게 잘 살아 있다.

 

DTS HD MA 7.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각 채널로 각종 효과음이 적절하게 분산돼 서라운드 효과가 좋다.

하지만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챙챙거리며 좀 얇게 들린다.

 

부록으로 제작과정이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있다.

제작과정도 HD 영상으로 제작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이 각본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스코트 감독은 시대상을 되살리는데 탁월하다. 어떤 포인트를 강조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아는 그는 이 작품에서 중세시대 투박한 전투를 잘 살렸고, 재판 과정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들을 잘 묘사했다.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섬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잘 묘사돼 있다. 프랑스 도르도뉴, 아일랜드 애드모어 등에서 촬영.
원작은 UCLA 영문과 교수인 에릭 재거의 소설이다.
맷 데이먼과 밴 애플렉은 각각 장과 자크의 시점을, 니콜 홀로프세너는 여성인 마르그리트의 관점에서 각본을 썼다.
촬영은 다리우스 월스키가 맡았다. 그는 '마션' '프로메테우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와 '크림슨 타이드' 등을 찍었다.
카르주 가문의 영지는 도르도뉴 지역의 베이낙 성에서 촬영.
이 영화에는 여러 성이 등장한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생트몽당의 페넬롱성, 몽 파지에, 부르고뉴의 베르제르샤텔 성 등에서 촬영.
실제 장과 자크의 결투는 오래된 생마르텡 드 샹 수도원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제작진은 결투 장면을 아일랜드 애시포드의 발리커리 미데인의 오크필드에서 촬영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된 중세 갑옷 파네스토크를 기반으로 각종 갑옷을 디자인했다.
제작진은 50개 이상의 방패, 수천 점의 무기를 만들어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