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블루레이)

우리 영화 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 기록을 세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년)는 안타깝고 처절한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청준의 연작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작품은 소리에 미쳐 세상을 떠도는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양딸 송화(오정해), 아들 동호(김규철)의 삶이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다.

 

여기저기 떠돌며 소리로 먹고사는 유봉은 북을 치는 아들과 소리를 하는 딸의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혹독하게 가르친다.

이 과정에서 아들 동호는 소리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죽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뛰쳐나간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유봉은 나이 들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면서 딸에게 더욱 집착한다.

무엇보다 완벽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딸에게 한약을 먹여 눈을 멀게 만드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가슴에 한이 응어리지면 소리로 터져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게 눈이 먼 딸을 데리고 떠돌던 유봉은 어느 궁벽한 시골 폐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세월이 흘러 동호는 아비에게 남기고 간 누이를 그리워하며 찾아 나선다.

그렇게 영화는 동호가 부녀의 행적을 쫓는 과정을 수수께끼 풀듯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끊임없이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다룬 로드 무비다.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인생들을 통해 우리네 고단한 삶을 들여다본다.

 

임 감독은 길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팬 하는 카메라를 통해 로드 무비의 특징과 분위기를 잘 살렸다.

무엇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남도의 풍경을 수려하게 담아낸 영상이 압권이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정일성 촬영감독이 잡은 영상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특히 유봉이 송화, 동호와 함께 진도 아리랑을 흥겹게 부르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내려오는 장면을 롱 테이크로 잡은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실제 풍경보다 멋있게 나온 카메라 장난일 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소리, 풍광이 어우러져 고단한 인생들의 흥겨운 한때를 가장 한국적인 영상으로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고택에서 학처럼 고고한 노인이 가야금을 타는 장면과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등은 요즘 세속에서 보기 힘든 한국의 풍경들이다.

 

아울러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소리꾼을 다룬 영화여서 실제 소리를 할 줄 모르면 인물을 제대로 살리기 힘들었을 텐데 김명곤은 물론이고 오정해가 훌륭한 소리꾼이어서 역할을 잘 살렸다.

 

김명곤은 어느 한 장면을 위해 명창을 찾아가 따로 소리의 한 대목을 배울 정도로 열정을 쏟았고, 오정해는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출신으로 김소희 명창의 제자다.

여기에 록커 김수철이 국악기를 동원해 만든 음악도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덕분에 이 영화는 망할 것이라는 제작진의 우려와 달리 우리 영화로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했고,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3대 영화상의 최우수작품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작품이 됐다.

이 같은 결과는 우리 고유의 '한'의 정서를 잘 살린 대가의 훌륭한 연출 덕분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길이 된단 말야"라는 대사가 이 영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한의 영화인 이 작품은 소리의 한을 파격적인 이야기와 수려한 영상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더러 플리커링이 보이고 일부 장면의 화질이 떨어지는 등 화질 편차가 크지만 전체적으로 디지털 복원이 잘 됐다.

 

무엇보다 단풍색 등 색상이 잘 살았다.

중경과 원경은 사람의 눈 코 입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디테일이 뭉개지지만 클로즈업은 괜찮다.

 

음향은 DTS HD MA 3.0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임 감독과 김홍준 감독, 김명곤 오정해 김수철이 참여한 해설과 임 감독과 김 감독의 해설 등 두 편의 음성해설, 2010년 임 감독 회고전 개막식 영상, 복원 전후 영상과 이미지 자료가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앞을 보지 못하는 젊디 젊은 고운 여성이 피 토하듯 뽑아내는 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오정해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배워 중1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1등을 하며 김소희 명창의 제자가 됐다. 그런 그의 꿈은 원래 연기자였다.

어려서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볼 수 있던 초가집이 지금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임 감독은 원래 '태백산맥'을 찍으려고 했으나 노태우 정권 시절 정부에서 이념문제를 들어 반대하는 바람에 대통령 선거 뒤로 제작을 미루고 남는 시간에 이 작품을 찍었다.

고창 선운사 골짜기에서 찍은 영상은 마치 화보같다. 임 감독은 1992년 남원 미스춘향 대회의 TV 중계에 나온 오정해를 보고 발탁했다. 원래 '태백산맥'의 무당 딸 소화역으로 점찍었다가 제작이 미뤄지면서 이 작품의 주연으로 기용했다.

멀리서 잡은 와이드 영상이 한국적 풍광을 기막히게 살렸다. 제작사 뿐 아니라 임 감독도 이 영화가 흥행이 안될 것으로 생각해 편하게 찍었다.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일행을 고인이 된 정일성 촬영감독이 롱테이크로 잡은 이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원래 시나리오에 없던 이 장면은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찍었다. 드라마 '봄의 왈츠'도 이 섬에서 촬영했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는 세트가 아니라 실제 길에서 발견해 촬영했다. 이 영화는 이청준의 연작 단편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이 원작이다.

한국영화를 숱하게 본 사람들은 이 풍경이 낯익을 수 있다. 이 장면을 찍은 벽제 세트장은 '장군의 아들' 1~3편과 '태백산맥' 등을 찍은 곳으로, 지금은 사라졌다.

동호가 부녀의 뒤를 쫓아 질퍽한 거리를 걷는 장면은 전북 오수에서 찍었다.

거문고 명인으로 인간문화재인 김무규 선생이 거문고를 타는 장면은 구례 지리산 자락에 있던 그의 자택 수오당에서 촬영. 이 집은 1994년 김무규 선생 타계후 2006년 매각돼 해체 후 순천으로 옮겨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됐다.

여러 개의 방이 일자로 쭉 이어 붙은 오래된 초가도 버려진 것을 우연히 발견해 촬영했다.

김명곤은 실명한 딸을 붙잡고 길을 걸으며 '사철가'를 부르는 장면을 찍기 위해 송순섭 명창을 찾아가 '사철가'를 따로 배웠다.

유봉은 부자라는 일종의 독약을 섞은 한약을 먹여 딸의 눈을 멀게 만든다. 원래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사 기자였던 김명곤은 대학 때 판소리에 반해서 고인이 된 박초월 명창의 제자로 들어가 10년간 소리를 배우며 배우로도 일했다.

동호가 안병경이 연기한 혁필가를 만나 누이의 소식을 듣는 장면은 속초에서 촬영.

눈이 먼 송화가 나이들어 동생 동호를 만나 '심청가'를 부르는 장면은 나이 든 목소리가 필요해 안숙선 명창의 소리를 썼다. 나머지 장면들은 오정해가 직접 소리를 했다. 동생 동호를 연기한 김규철은 누나 역할의 오정해보다 11살 많고 아버지 역할의 김명곤과 8살 차이다.

막판 오정해를 앞질러 뛰어가는 소녀는 이 작품의 조감독을 맡은 김홍준 감독의 딸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는 아역 배우를 구할 수 없어 급히 출연했다. 이때 김소희 명창의 구음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