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이 그린 배트맨 시리즈만 놓고 보면 조커는 배트맨의 원죄 같은 숙적이다.
조커가 아니었다면 배트맨의 부모는 죽지 않았을 것이고 배트맨 또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커의 기원은 곧 배트맨의 기원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팀 버튼의 '배트맨', '다크나이트' 등 숱한 작품들이 조커의 등장을 그렸지만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Joker, 2019년)는 결을 달리 한다.
우선 초점을 배트맨이 아닌 악당 조커에 맞췄다.
그것도 단순 사건 위주의 피상적 전개가 아니라 어떻게 조커가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심리적 성찰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배트맨과 조커의 한바탕 액션을 기대하고 보면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아예 박쥐 마스크와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배트맨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다른 배트맨 시리즈 못지 않게 놀라운 흡입력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가장 큰 이유는 조커가 느끼는 분노에 대한 공감대다.
코미디언을 꿈꾸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아더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긴장하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는 병을 앓는다.
일종의 우울증이 낳은 자기 방어의 기제인 셈이다.
아더는 빈곤층 무료 지원에 따라 우울증 약을 받아 겨우 생활했으나 시에서 복지 예산을 줄이며 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치안도 불안해 강도를 당하면서 어렵게 잡은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힘들게 선 나이트클럽 무대의 스탠딩 코미디는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조롱거리로 쓰인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어머니마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기대할 것 조차 없는 아더에게 희망은 사치다.
아더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도 힘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린다.
이런 정황만 놓고 보만 아더가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에 절로 수긍이 간다.
그의 선병질적인 기질과 악마적 본성도 문제이지만 사회가 그를 몰아간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영화가 세상의 문제점을 거창하게 지적하는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영화 곳곳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삐걱거리는 사회 시스템을 지적하는 메시지로 얼룩져 있다.
빈부격차가 커지는 데도 복지 예산을 줄여 발생하는 폐해, 지하철과 뒷골목까지 미치지 못하는 치안의 부재, 시청률을 겨냥할 지언정 약자에 대한 배려를 찾아보기 힘든 TV 토크쇼 등 영화는 온통 사회의 부조리로 신음하고 있다.
심지어 극 중 부자들이 극장에서 관람하는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조차도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다룬 '모던 타임즈'다.
채플린은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명언을 통해 웃음 뒤에 숨어있는 눈물을 다룬 거장이었다.
이 조차도 충분히 사회적 메시지를 의식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아더는 겉잡을 수 없는 순간적 분노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어느덧 빈자들의 영웅이 된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영웅이요 기득권층에게는 악당인 조커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토드 필립스 감독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조커는 악당인가.
당신에게 악이란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빈부격차가 가져오는 반감과 부작용을 다룬 '기생충' 같은 영화다.
다만 기생충이 다층적 서사 속에 다양한 장르와 패러독스를 섞어 웃음과 공포, 비극의 복합적 감정을 선사한다면 이 작품은 시종일관 고대 그리스 희곡처럼 비극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조커의 붉은 발자욱을 통해 앞으로 그가 걸어갈 피의 범죄를 예고한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나면 무거운 납덩이로 눌러 놓은 것처럼 가슴이 묵직하다.
이는 곧 조커가 안고 있는 슬픔의 무게인 셈이다.
이처럼 일관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토드 필립스 감독의 놀라운 연출 덕분이다.
영화는 초반 택시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거리를 쳐다보며 등장한 아더가 막판 조커로 변신해 경찰차에 잡혀가며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비에 젖은 거리를 웃으며 바라보는 엔딩으로 이어지며 수미쌍관식으로 구성됐다.
그동안 어느 장면하나 버릴 것 없이 모든 숏이 비극과 분노, 슬픔을 향해 엄청난 에너지를 품은 채 질주한다.
압권은 뉴욕 브롱크스 167번가에서 찍은 계단 장면이다.
조커 분장을 한 아더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이 영화에 쓰인 음악 또한 훌륭하다.
묵직하게 울리는 첼로 연주부터 막판 흐르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That's Life', 크림의 'White Room'까지 영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를 빼놓을 수 없다.
토크쇼 진행자로 함께 출연한 로버트 드니로에 전혀 뒤지지 않는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클로즈업부터 롱샷까지 모든 앵글에서 적절하게 빛나는 연기를 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얼굴의 클로즈업 조차도 부담스럽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을 전달하며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리고 진정 숨막혔던 장면은 그가 락커룸에서 앙상한 등뼈를 드러내며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다.
마치 일그러진 초상처럼 말라 비틀어진 그의 등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그 어떤 배우가 등으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표정이나 몸짓, 대사가 없어도 그 모습 자체가 훌륭한 연기이자 웅변이었다.
더불어 청녹색 또는 황갈색의 일정한 색조를 유지하며 영상을 아름답게 빛낸 로렌스 셔의 촬영도 훌륭했다.
그의 정갈한 촬영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의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4K 타이틀은 4K와 일반 블루레이 등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됐다.
2160p U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4K 타이틀은 극상의 화질을 자랑한다.
디테일이 뛰어나고 발색이 아주 곱다.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음향은 청취 공간을 감싸는 뛰어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부록으로 호아킨 피닉스의 카메라 테스트, 제작과정과 호아킨 피닉스의 다양한 연기, 갤러리 등이 한글자막과 함께 HD 영상으로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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