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란 대문'(1998년) 하면 비운의 두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김기덕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지은이다.
1971년생인 배우 이지은은 2021년 3월 8일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등져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향년 49세.
고인이 된 이지은에 얽힌 인연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와 용산에서 자란 그는 일본 호세이대학 일문학과를 졸업한 뒤 '금홍아 금홍아'와 '파란 대문'에 주연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2000년 12월 벤처기업 인츠닷컴의 이진성 대표와 결혼하며 영화계를 떠났다.
개인적으로 이지은의 전 남편 이진성 대표와 인연이 있다.
그가 광고 마케팅 사이트 '보물찾기'로 유명한 인츠닷컴을 운영하던 시절 취재 때문에 여러 번 만났다.
느닷없이 이 대표가 유명 배우와 결혼한다길래 깜짝 놀랐지만 그는 원래 연예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성균관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LG산전에서 일했던 그는 1998년 엔터테인먼트 포털을 표방한 인츠닷컴을 설립한 1세대 벤처기업가다.
그는 디지털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디지테인먼트를 주창하며 여러 영화에 투자해 영화계 진출을 꾀했다.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단적비연수' '킬리만자로' 등에 투자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동시 상영하는 디지털 영화를 기획했다.
학창 시절 밴드 생활을 한 경력이 있어서 기타도 잘 쳤고 노래방에 가면 고음의 록 발라드를 가수처럼 아주 잘 불렀다.
하지만 많은 투자를 받아 전자상거래 등으로 급속하게 사업을 불렸으나 생각만큼 수익이 나지 않아 결혼한 이듬해인 2001년 경영 부진을 이유로 사임했다.
그 직후 회사 명의로 대출을 받아 갚지 않았다며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돼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아 풀려났으나 다시 사업을 하기는 힘들었다.
그 때문에 이지은이 2003년 서울 신사동에 어린이 전용 미용실 지아모 헤어를 개업했고, 가끔 이 앞을 오가다가 이진성 대표가 주차를 도와주는 모습 등을 보기도 했다.
그 뒤로 이 대표를 볼 수 없었는데 세금 체납건으로 언론에 보도되며 소식을 알게 됐다.
당시 이들 부부는 동부 이촌동 85평 아파트에 살았는데 2년간 3,800만 원의 세금을 체납해 강제 징수에 나섰다는 보도였다.
이 대표가 커피 프랜차이즈를 운영했으나 잘 되지 않아 세금을 체납하면서 강제 징수에 들어가서 보니 실제로는 대부분의 부동산이 근저당 설정 상태거나 처갓집 명의여서 이 대표 재산이 없다는 보도였다.
결국 2015년 이혼 소식이 흘러나왔다.
이후 이지은은 2018년부터 커피 프랜차이즈 대표를 맡아 아들을 홀로 키우다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파란 대문'은 그렇게 사라져 간 이지은을 기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생전에 활동 기간이 짧아 작품이 많지 않지만 개성 있는 외모와 연기력이 좋은 배우였던 만큼 오래 활동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든다.
비운의 예술가 김기덕
2020년 고인이 된 김기덕 감독도 비운의 예술가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뷔작 '악어'를 좋아해서 이후 그의 작품들을 열심히 봤다.
그는 워낙 강렬한 표현 방식 때문에 논란을 일으켰지만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국내 영화인들 중 유일하게 베니스, 베를린, 칸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중요한 상을 모두 수상한 이력이 이를 방증한다.
특히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국내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감독이 됐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그의 표현방식과 작품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독특한 시각과 영상으로 표현한 감독도 흔치 않다.
정작 개성 강한 그의 표현 방식과 스토리텔링이 과도한 논란을 불러일으켜 작품성을 가린 측면이 있다.
언론에 자주 나온 표현대로 확실히 그는 국내에서 저평가된 감독이다.
오히려 숱한 수상이 말해주듯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 감독도 이 때문에 해외로 나가 작품 활동을 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이런 결정이 비극을 불렀다.
그는 2020년 11월 20일 라트비아의 리가 인근 소도시 유르말라에 정착하려고 출국했으나 현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렸다.
그 바람에 합병증이 오면서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2020년 12월 11일 리가의 스트라딘시 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해외에서 거장 대접을 받은 감독으로서 너무 허무한 죽음이다.
그가 한국을 떠난 배경에는 여배우와 제작진에 대한 폭행, 성폭력 논란도 있다.
촬영 현장에서 여배우들에게 원치 않는 연기를 강요하고 성추행 등 성폭력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김 감독은 폭행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성추행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이후 김 감독은 사실이 아니라며 배우와 언론사를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했으나 무혐의 처리됐다.
이런 부분들도 김 감독과 그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하게 만드는 악재가 됐다.
이 또한 그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는데 걸림돌이 됐다.
설령 개인의 흠이 있더라도 작품은 별개로 평가받아야 한다.
살인을 저지른 카라바조나 제자를 핍박했던 로댕 등 지금은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이 숱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사 때문에 예술 작품의 진면목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부조리가 낳은 평화, 김기덕의 수작
김기덕 감독의 세 번째 영화 '파란 대문'(1998년)은 6번째 작품인 '나쁜 남자'의 전주곡 같은 작품이다.
내용은 파란색 대문을 가진 새장 여인숙에 소위 여관바리로 통하는 여관 매춘부로 일하게 된 진아(이지은)와 여인숙을 운영하는 가족 이야기다.
사실상 포주인 여인숙 여주인을 엄마라고 부르며 매춘부와 여인숙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진아에게 영향을 받은 여대생 혜미(이혜은)의 변화까지 모든 것이 흔치 않은 내용이어서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각종 소품을 이용해 그림 같은 영상으로 잡아낸 김 감독의 연출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에서 바닷가 마을의 여인숙으로 흘러든 매춘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여러 모로 '나쁜 남자'를 연상케 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매춘부 진아와 그를 좋아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고 갈취하는 양아치, 어쩔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소품으로 등장하는 에곤 쉴레의 그림까지 여러 상황이 '나쁜 남자'와 흡사하다.
다만 '나쁜 남자'가 여성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 결론으로 가슴을 아프게 했다면 '파란 대문'은 부조리한 현실을 한탄하면서도 겉으로는 단란하게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평화롭게 보인다.
'파란 대문'의 결론이 김 감독의 희망이었다면 '나쁜 남자'는 그가 직시한 현실일 수 있다.
모든 여성을 매춘부 취급한다는 김 감독에 대한 비난의 단초가 이 작품부터 싹튼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김 감독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는 여성을 피해자이면서 구원자라는 두 가지 시각으로 그린다.
이 작품에서도 진아는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하는 피해자이면서 가족의 갈등을 해소해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구원자 역할을 한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나쁜 남자' '피에타' '빈 집' 등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여성들이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변하게 만드는 구원자이자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어찌 보면 그런 이중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과도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꼭 그런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표현 방식은 감독의 선택이며 이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덜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등장한다.
특이하게도 같은 여성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심리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보다 더 크게 부각됐다.
그렇기에 겉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폭력, 즉 은연중 타인을 멸시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 어린 시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김 감독의 독특한 시각을 느낄 수 있는 영상과 잔잔한 음악, 개성 강한 배역 등이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DVD보다 월등 개선된 반가운 블루레이 타이틀
이번에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과 음향, 부록 등에 아쉬움이 있지만 김 감독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반갑다.
1080p 풀 HD의 1.78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DVD 타이틀에 비하면 화질이 월등하게 개선됐다.
무엇보다 DVD 타이틀에서 화이트 피크가 높아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던 색감이 명료해졌다.
물론 원본 필름의 한계 때문에 여전히 색감이 뿌옇고 잡티 등 필름 손상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샤프니스도 높지 않아 중경과 원경의 디테일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클로즈업 화면이 또렷하게 살아 있으며 DVD 타이틀에서 하얗게 들뜬 영상도 많이 가라앉았다.
DTS HD MA 2.0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음량이 일정하지 않고 명료하게 들리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한글 자막을 켜고 보는 것이 좋다.
부록은 전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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