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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미인: 블루레이

울프팩 2018. 12. 5. 00:07

1970년대와 1980년대 동네 음반점들은 요즘 볼 수 없는 특이한 장사를 했다.

듣고 싶은 노래 목록을 적어서 가져가면 LP를 재생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주고 돈을 받았다.

 

집에서 FM 라디오를 틀어 놓고 카세트테이프로 직접 녹음할 수도 있지만 노래 앞뒤로 치고 들어오는 DJ 멘트가 문제였다.

그래서 원곡을 깨끗하게 듣고 싶을 경우 주로 이용했다.


금지곡 테이프의 추억

 

싱글이 없는 국내 음반업계의 특징도 이런 장사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였다.

아주 좋아하는 가수가 아닌 이상 듣고 싶은 노래 한 두 곡 때문에 LP나 카세트테이프를 사는 것이 부담스럽던 시절이었다.

 

동네 음반점의 녹음 서비스는 LP보다 음질이 떨어졌지만 원하는 곡들만 모아서 녹음한 일종의 편집 음반인 셈이어서 만족도가 높았다.

물론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동네 음반점을 들락거리다가 친해지면 주인아저씨가 음반 추천은 물론이고 몰래 특정 카세트테이프를 권하기도 했다.

일명 금지곡 테이프였다.

 

1975년 이후 정부에서 문화 검열을 심하게 하면서 금지곡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바람에 방송은 물론이고 길거리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가요나 외국 노래들을 녹음해 팔았다.

도대체 어떤 곡이길래 금지곡으로 묶였을까 하는 호기심에 금단의 열매를 따는 심정으로 사서 들어본 노래들은 약간 무서웠다.

 

노래를 무섭게 불러서 그런 게 아니라 왠지 해서는 안될 짓을 하는 듯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때 들은 금지 가요들이 '고아' '아침이슬' '고래사냥' '불 꺼진 창'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 '친구' 등이었다.

 

신중현이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데뷔 음반을 통해 발표한 노래 '미인'도 금지곡 테이프를 통해 제대로 된 완곡을 들었는데 좀 특이했다.

우울하거나 저항적인 내용의 노랫말을 담은 다른 금지곡과 달리 흥겹게 튕기는 기타 선율 위에 실린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삿말이 웃겼다.

 

왜 금지곡으로 묶였나


도대체 이 노래가 왜 금지곡으로 묶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 웃긴 가사가 문제였다.

온갖 사람들이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부분을 너도 나도 상황에 따라 개사해 부르는 바람에 군사 독재정권에서 미풍양속에 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막노동꾼은 육체노동의 피로를 담은 노동가로, 장사꾼은 하루벌이의 고단함을 실은 하소연으로, 아저씨나 청년들은 선정적인 내용으로 야하게 고쳐 불렀다.

심지어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원곡도 모르면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할 때 '한 번 따고 두 번 따고...' 어쩌고저쩌고 지껄일 정도였으니 사실상 전 국민이 다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인'이 금지곡으로 묶이기 전에 이토록 인기를 끈 것은 귀에 쏙쏙 박히는 강렬한 멜로디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설적인 가사 덕분이었다.

노래를 부르기 전 한음 한음 튕기듯 시작되는 기타 전주는 마치 바가지를 두드리는 것처럼 흥겨웠다.

 

언뜻 들으면 각설이들의 장타령을 연상케 하는 이 부분을 당시 언론에서는 '장타령에 록음악을 접목했다'라고 평했다.

음을 들어보면 서양 음계는 아니고 각설이 타령을 연상케 하는 국악 같은 음계다.

 

여기에 신중현의 밴드였던 신중현과 엽전들의 멤버인 신중현, 이남이 등이 TV에 출연하면서 거지를 연상케 하는 긴 장발에 벙거지를 쓰고 나왔다.

그 바람에 이형표 감독이 만든 영화 '미인'의 당시 광고물을 보면 신중현을 가리켜 '각설이 기타의 일인자'라고 표기했다.

 

물론 위정자들은 이를 좋게 볼 리 만무했다.

가뜩이나 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차림새까지 거지 꼬락서니이니 제대로 찍혔다.

 

그래서 가사나 곡조는 문제없지만 사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는 희한한 이유로 1975년 7월 12일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서 발표한 2차 금지곡 명단에 포함됐다.

이렇게 묶인 금지곡들은 방송은 물론이고 공연이나 음반 판매 및 공공 청취가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셈이다.

그 유탄을 제대로 맞은 것이 이형표 감독의 영화 '미인'(1975년)이다.


신성일을 발굴한 이형표 감독의 영화


2010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형표 감독은 이 작품을 만들 당시 충무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대 영어영문과 시절 이구영 감독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다가 눈에 띄어 졸업 후 미 공보원 영화과에서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미국 CBS와 NBC TV 특파원으로 뉴스를 만들었고 미국 파라마운트사에서 오언 크렘프 감독의 입체영화 '휴전'의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덕분에 신상옥 감독이 세운 유력 제작사 신필름에 기술부장으로 입사해 촬영, 편집, 미술, 연출, 각본 등 다양한 일을 했다.


특히 1961년 신 감독의 '성춘향'을 국내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해 이름을 알린 뒤 그 해 '서울의 지붕 밑'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는 또 얼마 전 작고한 한국 영화계의 전설적 스타인 신성일을 발굴한 감독이기도 하다.


1959년 서울에 상경해 연기 학원을 다니던 신성일이 신필름의 신인 배우 공모에 응시하기 위해 길게 줄 서있는 모습을 이 감독이 지나가다가 보고 배우가 될 재목이라고 여겨서 따로 불러내 추천 쪽지를 써줬다.

덕분에 신성일은 3,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배우가 됐다.


금지곡의 유탄을 맞은 영화


영화가 기획된 것은 1975년 5월.

정부에서 문화 검열을 강하게 실시하기로 하고 한국예술문화윤리위가 본격 검열에 착수한 6월보다 일찍 기획에 들어갔다.


당시 언론에서는 기타 천재인 신중현이 만든 인기 가요 '미인'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고 널리 보도했다.

'미인'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신중현은 시나리오를 보기도 전에 출연 계약을 했다.

 

그러나 정부가 7월에 발표한 2차 금지곡 명단에 '미인'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정하연에서 김하림으로 바뀌며 내용이 달라졌고 배우도 교체됐으며, 결정적으로 신중현과 엽전들의 음반에 실렸던 '미인'을 비롯한 상당수의 노래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 바람에 영화 '미인'에는 제작 동기가 된 노래 '미인'이 나오지 않는다.

황당하게도 짜장면이 맛있기로 소문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팔지 않은 격이다.

 

영화 흥행이 신통치 않았던 배경에는 이처럼 정부의 금지곡 지정이 큰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흥미롭다.


내용 때문이 아니다.

정작 내용은 요즘 보면 닭살이 돋을 만큼 상투적이고 교조적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음악 한길만을 파는 가난한 청년들이 미인의 도움을 받아 음악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 결국 유명해진다는 내용이다.

여인의 도움이라는 게 별 것 아니고 어려울 때 밥값과 방값을 대신 내주고 열심히 하라며 격려해 주는 정도다.

 

하지만 워낙 청년들의 상황이 힘들었기에 이조차도 큰 힘이 된다.

어느새 밴드의 리더인 현(신중현)의 가슴속에는 미인(김미영)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되고, 단순히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음악에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뮤즈로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여인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면서 현은 방황하게 된다.

결국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인을 맞닥뜨린 현은 모든 것이 무너지듯 절망하게 된다.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1970년대 신파조 영화들처럼 뻔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심을 끄는 것은 신중현의 현란한 사이키델릭 음악 덕분이다.

월남전 시절 미국에서 유행했던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나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의 사이키델릭 음악이 국내에도 뒤늦게 들어와 유행했는데 신중현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물론 유명한 금지곡 '미인'은 나오지 않지만 '설레임'이나 '휘파람' '너만 보면', 장현의 노래로 유명한 '미련' 등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이 곡들은 신중현이 음반에 수록한 원곡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해 더 소중하다.

 

'미련'은 신중현이 다른 악기 없이 통기타만으로 박자를 늦춰 처량하게 연주했고 '너만 보면'과 '나는 몰라'는 직접 노래까지 불렀다.

사실 신중현은 영화 막바지에 눈치채지 못하도록 '미인'도 멜로디를 편곡해 영화에 집어넣었다.

 

거친 신중현의 기타 리프로 변주된 '미인'은 일부러 의식하고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같은 곡이라는 점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속 '미인' 또한 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곡인 셈이다.

 

이 작품은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 음반이 따로 없다.

따라서 사이키델릭에 한창 심취했던 신중현의 노래와 연주를 영상과 함께 볼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 의미가 크다.

거기에 어색하고 서툴기는 하지만 신중현과 엽전들 구성원인 신중현, 이남이, 권용남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반갑다.

 

이후 신중현은 영화 개봉 후 연말에 터진 대마초 사건때 이장희 등 유명 가수들과 함께 잡혀 들어간 뒤 한동안 방송에서 볼 수 없게 됐다.

훗날 '울고 싶어라'라는 노래로 꽤 큰 인기를 얻었던 가수 이남이를 고인이 되기 전인 1990년대 후반에 두어 번 만나 술을 마셨는데 그때 동석했던 사람들의 권유로 부르던 '미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또한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때 아마 영화 '미인'을 먼저 봤더라면 물어볼 말이 많았을 텐데 지나고 보니 안타깝다.


영화 속 밴드들에게 음악적 영감의 상징이었던 미인 역할을 배우 김미영이 맡았다.

1970년대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여고시절'과 '별들의 고향'에 나온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다.

 

안타까운 사연의 미인을 연기한 김미영은 둥그스름한 선이 고운 동양의 미인상이었다.

더불어 낯설게 보이는 1970년대 서울 풍경은 영화가 귀중한 사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마치 촌동네를 연상케 하는 서울 명동거리는 물론이고 한강물이 파도치듯 철썩이는 광나루(광장동) 강변과 좁은 광진교를 보면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과 다르다.

이 또한 이 작품이 주는 재미다.

 

다만 영화적 완성도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 당시 히트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졸업' '태양은 가득히' 등 외국 영화들을 흉내 낸 장면과 무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삽입곡들,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종잡을 수 없게 편집된 이야기와 도덕 교과서를 연상케 하는 교조적 대사들을 보면 시대적 상황 때문에 졸속 제작된 영화의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워낙 오래된 작품인 만큼 화질에 한계가 있다.

원본 필름의 영향으로 잡티 등 필름 손상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일부 장면에서는 화면 오른쪽에 열화 현상이 보이고 중경과 원경에서 디테일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블루레이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1차 보정을 거친 오리지널 네거 필름을 다시 크리에이티브이미지컴퍼니에서 디지털 스캐닝과 텔레시네 작업을 거쳤지만 원본 필름의 문제를 뛰어넘기는 힘들다.


또 원본 필름의 프레임 소실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어색하게 튀는 장면도 있다.

편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해 보인다.


음향은 오리지널 필름에서 리마스터링을 거친 모노 사운드이다.

그렇다 보니 에코가 심하게 들어간 상상 장면 등에서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글자막이라도 넣어줬으면 한결 나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또 당시 영화 제작 환경이 후시 녹음이어서 일부 장면에서는 오디오 싱크가 어긋나기도 한다.


심지어 연주 장면조차도 손놀림과 음악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부록은 예고편 외에 전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영화는 1975년 8월 30일 스카라극장에서 개봉했으며 당시 4,108명의 관객이 들었다. 흥행작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서울 명동거리에서 촬영. 신중현 뒤로 베이스를 쳤던 이남이와 드러머 권용남 등 3인조였던 신중현과 엽전들의 멤버들이 보인다.

아무리 1970년대이지만 맨션이라고 부르기 힘든 창고 같은 건물. 아마도 제작비 때문에 이런 곳을 빌린 듯싶다.

신중현이 통기타로 운치 있게 연주하는 장현의 '미련'을 들을 수 있다.

명동 거리를 지나는 미인의 뒷모습. 신중현이 작곡한 '빗속의 여인' 노랫말처럼 노란 비옷을 입고 걸어간다.

극 중 여가수가 '빗속의 여인'을 부른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을 대놓고 베낀 장면. 심지어 삽입곡까지 똑같은 사이먼과 가펑클의 'sound of silence'가 나온다.

나이트클럽과 계약해 돈을 번 밴드 멤버들이 선물을 잔뜩 사서 들고 가는 장면에 신중현과 엽전들 2집에 수록된 '휘파람'이 흘러나온다.

이곳이 지금은 워커힐 호텔과 아파트가 들어선 광나루다. 강변 바로 앞에 강물이 출렁였던 이 곳에 장어집이 즐비해 사람들이 장어를 먹고 뱃놀이를 즐겼다. 건너편 천호동과 암사동쪽은 모래강변이어서 여름이면 수영을 많이 했다.

비틀스 멤버들을 그려 넣은 사이키델릭 한 벽면과 멤버들이 입은 화려한 꽃무늬 의상이 잘 어울린다. 의상은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가 담당했다.

신중현이 통기타로 '설레임'을 연주했다. 그 앞에 '환타' 병이 보인다.

미인으로 등장한 김미영. 신중현은 먼저 출연 계약 후 나중에 시나리오를 봤는데, 몹시 실망했단다.

묶인 나룻배에 상체를 벗은 채 등짝이 온통 햇볕에 탈 정도로 신중현이 끌려 다니는 상상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그대로 베낀 장면이다. 여기서도 주제곡 쁠렝 솔레이가 똑같이 나온다.

발코니 장면에서는 프랑코 제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대놓고 베꼈다. 음악도 역시 동일하다.

서울 신촌의 이대 앞 거리 풍경.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상상이 조합된 내용은 신중현이 연주했던 사이키델릭 음악 같다. 신중현과 이남이의 온갖 물감으로 칠한 사이키델릭 한 기타가 인상적이었다.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 가짜 여대생 이야기도 나온다. 이 작품은 민망하게도 국내 최초의 록 뮤지컬을 표방했다.

이 작품은 호스티스 문화와 가짜 여대생 사건, 반항적인 록음악과 독재정권 아래 억압된 사회분위기 등 1970년대 시대상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신중현과 엽전들 1집 - 미인 (LP Miniature)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미인 (1Disc 150매 한정반) : 블루레이
신중현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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