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이 제작 각본 감독 주연에 작곡과 지휘까지 한 '뉴욕의 왕'(A King in New York, 1957년)은 그가 출연한 마지막 영화다.
그리고 그의 아픔과 시련, 분노가 담긴 영화다.
찰리 채플린은 매카시즘 열풍이 몰아치던 1940년대 말 미국 극우파들로부터 반미주의자, 즉 빨갱이가 아니냐는 공격을 받았다.
제 2 차 세계대전 때 구 소련을 지원해 유럽에 제 2 전선을 펴야 한다는 지원 연설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지 않는 것이 비난의 원인이 됐다.
극우단체들이 몰려가 채플린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 개봉 반대 시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1952년 도망치듯 미국을 떠났다.
채플린은 영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미국의 추방통지서를 받았고, 결국 스위스에 안착한다.
채플린이 공들여 할리우드에 세운 스튜디오와 집을 고스란히 놔둔 채였다.
미국의 처사에 정나미가 떨어진 부인 우나는 미국 시민권까지 포기했다.
이런 대우를 받았으니 미국에 좋은 감정을 가질리 없다.
이 영화는 채플린의 울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내용은 어느 왕국의 왕이 재산을 싸들고 미국으로 도피한 뒤 격게 되는 일들을 다뤘다.
형식은 코미디이지만, 냉정하고 보면 미국 사회의 병폐를 꼬집은 정치 풍자극이다.
특히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그의 시선이 직선적인 대사와 조롱에 가까운 영상으로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열심히 책을 읽은 소년에게 왕이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
"마르크스 책"이라는 대답에 왕이 "공산주의자냐"라는 질문을 재차 던진다.
소년 왈, "마르크스를 읽으면 모두 공산주의자인가요?"
여기에는 정부의 요청으로 구 소련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사회주의자들을 친구로 뒀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린 채플린의 답답한 반문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공산주의냐고 묻는데 지쳤어요. 그렇다고 인정해야 모두가 만족한다면, 그래요, 난 공산주의자에요."
이 또한 공산주의자이길 요구한 반미위원회 활동이나 극우세력들에 대한 채플린의 대답이다.
이 같은 내용 때문에 유니버셜은 미국 내 개봉을 16년이나 늦췄고 그것도 10여분을 잘라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작품이 채플린의 보복이라고 생각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채플린의 울분이든, 보복이든 상관없이 객관적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세련되거나 은근한 맛은 없지만 미국 정치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간파하고 냉정하게 꼬집었다.
채플린 특유의 엎어지고 넘어지는 마임식 슬랩스틱 대신 고난도 풍자로 허허로운 웃음을 웃게 하는 그의 색다른 코미디가 빛을 발한 매력적인 작품이다.
4 대 3 풀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의 흑백 영상은 제작 연도를 감안하면 화질이 괜찮다.
별다른 잡티나 필름 손상 흔적없이 복원이 잘 된 편.
음향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으로 작품 소개와 배경 및 아웃테이크 등이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민중 봉기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재산을 싸들고 도피한 왕을 연기한 찰리 채플린. 그는 영국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채플린은 록큰롤이 널리 유행하기 전에 이 작품을 통해 록큰롤의 유행을 예상했다. 그의 시선에서 보면 록큰롤은 경박한 미국의 문화였다.
더불어 채플린은 고개를 정신없이 좌우로 돌리며 영화를 보는 장면을 통해 당시 막 대두한 와이드스크린도 꼬집었다.
원래 채플린은 여주인공으로 케이 켄달을 생각했으나 돈 아담스로 바꿨다. 돈 아담스는 당시 이탈리아 왕자와 약혼 한 상태였다.
당시 미국인들의 삶에 파고든 TV와 덩달아 크게 늘어난 광고의 홍수를 비꼰 장면. 와이퍼가 달린 TV화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채플린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소년 역할은 채플린의 아들 마이클이 연기. 당시 마이클 채플린은 10세였다. 원래 그는 채플린 뒤에서 콩을 던지는 역할이었으나 연기를 지켜 본 채플린이 중요한 소년 역을 맡겼다.
이 작품은 런던에서 12주에 걸쳐 촬영했다. 촬영은 조지 페리날이 맡았으나 촬영 방법을 놓고 채플린과 마찰을 빚었다. 이야기를 중시한 채플린은 카메라 위치나 조명에 신경쓰는 페리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남들은 코미디를 보며 파안대소하지만 왕은 얼굴을 부여잡고 웃지를 못한다. 성형수술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선 성형수술 붐이 일었다.
극 중 극 형식을 빌려 삽입한 코미디. 이 작품 촬영 당시 채플린은 67세였다.
뉴욕에 도피한 왕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설계도를 갖고 있다. 느닷없이 핵 얘기를 집어 넣은 것은 당시 미국에서 공산주의자이며 유대인이었던 로젠버그 부부가 핵 기밀을 소련에 빼돌린 혐의로 간첩죄 적용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채플린은 죽는 순간까지도 간첩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이들 부부의 사건을 민감하게 봤다.
결국 채플린은 반미위원회에 물을 퍼붓는 방법으로 마음 속의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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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 뉴욕의 왕 / 파리의 여인 (2disc)
찰리 채플린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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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나의 자서전
찰리 채플린 저/이현 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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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있는 식탁
고은경 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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