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베를린

울프팩 2013. 2. 9. 18:56
액션물을 좋아하는 액션 키드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은 한국판 '본' 시리즈를 보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액션이 요란하고, 나쁘게 말하면 할리우드 영화를 닮았다.

북한과 남한, 그리고 아랍계 악당들에게 쫓기는 하정우가 높은 건물을 휙휙 날고, 격투 끝에 달아나는 장면은 영락없이 본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본' 시리즈를 비롯해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007 근작, '미션 임파서블' 등의 액션들이 대부분 잡고 꺾고 비틀며 관절을 공격하는 격투기와 건물과 건물을 건너 뛰며 높은 곳에서 내리 뛰는 야마카시 같은 동작들을 적극 활용한다.

그렇다보니 서로 닮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도 최근 액션물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만 막판 갈대밭 대결 장면은 테렌스 영 감독의 '레드 선'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게 있다면 남과 북의 이념적 대치상황을 베를린이라는 낯선 곳에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왜 하필 베를린일까.
남과 북의 요원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은 도쿄를 비롯해 베이징 모스크바 동유럽 등 여러 군데가 있다.

그런데도 하필 베를린을 활극의 장소로 선택하다 보니 과거 동백림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67년 중앙정보부가 독일 유학 중이던 학자나 문화인들이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 간첩 교육을 받은 뒤 대남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잡아들인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베를린까지 날아와 작곡가 윤이상 등 관련자들을 강제로 잡아다 고문하며 사건을 조작해 몇 명에게 사형까지 선고하며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결국 무리한 수사로 최종심에선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했고, 독일과 외교적 마찰까지 빚어 관련자들이 모두 풀려났다.

그만큼 베를린은 냉전 시대 독일이 동서로 분단됐던 시절 덩달아 남과 북의 이념이 첨예하게 맞부딪혔던 아픔과 비극이 상처로 남아있는 장소다.
그런 점에서 동백림 사건이 후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념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네 상황을 감안하면 베를린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영화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관객이 그런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베를린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만큼 베를린의 정치적 역사적 배경과 이어지는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베를린의 풍물을 잘 살린 느낌도 그닥 들지 않는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제외하고는 막판 결투를 벌이는 장소나 등장인물들이 쫓기는 지역이 베를린 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국적인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영화 속에서는 북한의 마카오 비밀계좌를 발단으로 삼으면서 이를 베를린에서 추적하는 것도 생뚱맞다.
스케일도 커지고 돈을 꽤 많이 쓴 흔적이 보이는데, 정작 중요한 베를린이라는 장소의 개연성이 떨어지다보니 내실이 비어있는 바람빵 같다.

이런 점들을 제외하면 중간에 이야기가 늘어지긴 하지만 할리우드 액션물처럼 적당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킬링타임용 무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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