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26년

울프팩 2012. 11. 30. 22:00

조근현 감독의 '26년'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유족들이 모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단죄하는 내용의 영화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실제 역사와 상상을 어떻게 버무렸을 지 궁금했는데, 기대 이하로 실망스럽다.

강풀의 원작 만화를 보지 못해서 영화 내용이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 지 알 수 없지만 영화의 내용은 너무 치졸하다.
제작진의 역사 인식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주인공들의 단죄는 개인의 분노와 복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초반 5.18 항쟁 당시 개개인의 과거 사연을 만화로 처리해 현재 시점의 실사와 차별한 시도는 좋았지만 이후 이야기의 진행은 너무 답답하고 맥이 빠지게 흘러간다.
왜 그리 등장인물들의 사설은 길고 구구절절한 지 일장 연설을 듣는 것 같고, 막상 복수에 나선 행동은 마치 골목 싸움에 나선 아이들의 치기어린 행동 마냥 개연성이 떨어지고 어설프다.

특히 황당한 것은 광주에서 올라온 깡패들(진구).
우왕좌왕 무대뽀로 경찰을 밀어 붙이며 맨 손으로 덤볐다가 나중에 무기를 꺼내서 또 덤비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한다.

학살극의 수괴(장광)를 죽이려고 나선 국가대표 사격선수(한혜진)나 수괴의 눈 앞에서 총을 겨누고 서서 연설을 하는 이경영의 행동 등은 1970, 80년대 고전 액션영화에서 적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는 우를 범하는 악당들처럼 답답하다.
막판 180도 달라지는 경호실장(조덕제)이나 경찰관(임슬옹)의 태도 또한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 황당하다.

더욱이 전두환을 만나기 위해 재벌 총수가 됐다는 이경영의 역할은 현실감이 완전히 떨어지는 SF적 상상력의 극치다.
그만큼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감정 과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역사적 사실인 만큼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도록 좀 더 설득력있게 풀었어야 했다.
우리가 절대 잊어선 안되는 과거사를 다시 환기시켜 준 점은 고맙지만 돋보이는 영상도 없었고, 원작의 문제인 지 영화만의 문제인 지 모르겠지만 스토리와 구성 모두가 한심하기 그지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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