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스캐너 다클리

울프팩 2013. 10. 11. 15:28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스캐너 다클리'(A Scanner Darkly, 2006년)는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이다.
즉, 실사로 촬영한 영상 위에 애니메이터들이 그림을 덧입히는 방법으로 제작됐다.

그만큼 움직임이 실사 영화처럼 자연스러운 점이 장점이지만, 실사 영화를 찍어서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작업을 거쳐야 하므로 두 번의 손이 가는 만큼 오래 걸린다.
감독의 전작인 '웨이킹 라이프'가 같은 방법으로 제작됐는데, 그때 재미있게 봐서 이 작품도 보게 됐다.

원작은 유명한 SF소설가인 필립 K 딕의 동명소설.
근 미래의 사회에서 사람의 두뇌를 파괴하는 마약을 쫓는 수사관과 마약 중독자들의 이야기다.

마약 중독 상태에서 환각을 보는 상황을 아주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작자인 필립 K 딕은 약물에 중독됐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썼다.

약물 중독 상황뿐만 아니라 필립 K 딕의 평생을 쫓아다녔던 정부에 대한 불신과 공포, 의심, 강박관념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갖가지 첨단 장치를 동원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심지어 동료까지 속이며 함정에 빠트린 뒤 수사하는 과정은 또 다른 빅브라더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끔찍하다.

그런 점에서 링클레이터 감독은 로토스코핑 기법을 적절하게 선택했다.
사람이 곤충으로 변하는 약물 중독자의 환각이나, 필립 K 딕이 창안한 수백만 가지 모습으로 외모가 끊임없이 변해 정체를 감춰주는 스크램블 슈트 등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

키아누 리브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로리 코크레인 등 낯익은 배우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바꾼 영상이 재미있다.
다만 위노나 라이더, 우디 해럴슨 등은 한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다.

아마도 다른 배우들의 비해 선이 뚜렷하지 않은 인물의 특성 때문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로토스코핑 기법과 필립 K 딕의 독특한 이야기 만으로도 볼 만한 작품이다.

2.3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무난하다.
계단 현상이 보이긴 하지만 선이 굵은 작품 특성상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음향은 돌비 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으로 감독과 작가, 필립 K 딕의 딸이 참여하는 음성해설과 제작과정, 애니메이션 제작 영상 등이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약물 중독자가 벌레를 보는 환각 장면은 필립 K 딕의 룸메이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벌레가 온 몸을 덮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점점 약물에 중독돼 가는 수사관을 연기한 키아누 리브스. 링클레이터 감독이 각본도 썼다.
필립 K 딕은 항상 FBI에 감시당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실사 촬영은 23일 걸렸고, 애니메이션은 50여명의 애니메이터가 18개월 동안 작업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상상을 말풍선처럼 표현. 로토스코핑은 태블릿을 이용해 실사 영상에서 인물의 윤곽선만 따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
필립 K 딕은 영화처럼 1970년 아내 낸시와 이혼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이혼한 두 형제를 비롯해 같이 살고 싶어하는 사람을 누구나 받아들였다.
외모가 끊임없이 변하는 스크램블 수트는 20여명의 애니메이터가 작업했다. 필립 K 딕은 이 작품으로 1978년 영국 SF협회상을 받았다.
딸에 따르면 필립 K 딕은 1950년대부터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각성제를 복용했다. 세간에는 LSD로 알려졌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필립 K 딕은 인터뷰에서 환각제 복용을 묻는 질문에 장난삼아 그렇다고 대답했다가 평생을 후회했다고 한다.
필립 K 딕은 영화처럼 브레이크가 파열돼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그는 누가 고의로 자동차를 고장냈다고 생각했다.
필립 K 딕은 같이 사는 사람 중에 누구인지 모르지만 밀고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밀고자가 많았던 닉슨 시절을 살았던 인물이다.
필립 K 딕은 광장공포증이 있어서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테리 길리엄 감독은 1990년대 초반 이 작품을 실사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필립 K 딕은 약물 중독 치료를 위해 스스로 캐나다의 엑스칼레이 재활원에 들어갔다. 그 곳은 헤로인 중독자를 치료하는 곳이어서 필립 K 딕은 헤로인 중독자인 척 했다.
여주인공을 맡은 위노나 라이더. 그의 정체는 또하나의 반전이다. 배우들은 애니메이션 작업을 염두에 두고 평소보다 동작을 크게 연기했다.
필립 K 딕은 당시 존재한 재활원 두 곳을 합쳐 뉴패스를 만들었다. 그는 마약과 전쟁이 재활원 고객을 늘리는 장사라고 봤다. 그는 44편의 장편과 121편의 중단편을 남겼다.
딸은 필립 K 딕의 약물 과다 복용이 죽음을 앞당겼다고 봤다. 본명이 필립 킨드리드 딕인 그는 53세인 1982년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쌍둥이 누이가 한 달 만에 죽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고 평생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