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지슬

울프팩 2013. 4. 7. 23:00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오멸 감독의 '지슬'(2013년)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영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것도 현란한 색들이 난무하고 입체영상이 스크린을 뚫는 시대에 아득한 시절 세상을 주름잡은 공룡같은 흑백 영상으로 승부를 걸었다.

오 감독이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흑백 영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흰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가지를 뻗친 나무와 오롯이 흰 눈을 이고 선 집들을 보면 여백의 미를 살린 동양화 같다.

여백의 미는 생각을 정리할 틈을 준다.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하얗게 또는 온통 검게 변하는 화면은 보는 이의 감정으로 서서히 차오른다.

특히 온통 어둠 뿐인 지하 동굴에 숨은 사람들이 부유하듯 화면을 떠다니며 두런 두런 대화를 나누는 감각적인 영상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사방이 죽음인 온통 어둠 뿐인 세상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떠있는 듯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만큼 불안해 보인다.

더불어 이 영화는 유독 팬이 많이 쓰였다.
시간을 왜곡하며 너울너울 춤추듯 천천히 옆으로 흐르는 영상은 넋두리처럼 처연하다.

이중노출을 활용한 영상도 한 편의 그림이다.
두 젊은이가 줄달음치는 오름이 서서히 맥을 놓고 쓰러진 여인의 젖가슴으로 변하는 장면은 더 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프다.

어린 여인 만큼이나 영화 속 사람들은 영문 모를 죽음을 맞는다.
마을에 책을 가지러 가다가, 자식처럼 키우는 돼지에게 먹이를 주러 가다가, 홀로 남아 집을 지키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인들의 총칼에 처참하게 죽어 나간다.

빨갱이 토벌을 명분으로 불어닥친 피바람에 거동조차 제대로 못하는 할머니가 군인의 칼을 맞고 묻는다.
"빨갱이가 뭐길래?"

할머니를 찌른 칼을 닦으며 군인이 대답한다.
"빨갱이 새끼들은 무조건 죽여야 해."

빨갱이가 뭔지, 누가 빨갱인 지, 왜 빨갱이를 죽여야 하는 지 묻지도 않고 설명도 없이 일어난 4.3 사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다.
이 물음은 비단 4.3 사건 뿐 아니라 독립 이후 줄기차게 우리 현대사를 옥죄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비극을 되풀이하는 질곡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오로지 죽어야 될 이유가 분명한 사람은 김 상사 뿐이다.
그렇기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그가 가마솥에서 맞는 비극적 죽음이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이 작품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것은 노래처럼 쏟아지는 제주 방언이다.
자막이 없으면 알아듣기 힘든 제주 방언은 울거나 웃게 만드는 힘을 지닌 노래다.

혹자들은 제주어를 쓰는 사람 적은 사투리 정도로 치부하지만, 언어학자들은 제주어를 고어의 보물창고로 꼽는다고 한다.
이충재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4월2일자에 쓴 칼럼 '지슬과 제주어'(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4/h2013040121040724440.htm)를 보면, 제주어에 훈민정음 반포 당시 사용한 아래아, 반치음 등 중세 어휘가 상당수 남아있고, 제주 노인들은 이를 정확히 구분해 발음한다고 한다.

그만큼 언어학적 가치가 높지만 이제는 쓰는 사람이 없어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분류했고, 정부는 '제주어 보존 및 육성조례'를 제정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봐서 4.3 사건을 다시 짚어보고, 제주어 보존을 위한 노력도 제고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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