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은 가족에 얽힌 아픈 과거사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유학 갔던 삼촌이 사회주의자가 되면서 아버지 등이 좌익 활동에 연루돼 곤욕을 치른 것.
특히 아버지가 빨치산이 돼 집을 나간 뒤로 거의 날마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집 뒤짐을 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임 감독은 중학교 3학년 때 집을 나와 부산에서 군화를 떼어다 팔면서 살았다.
그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영화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임 감독도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그런 만큼 '짝코'(1980년)는 임 감독 입장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망실공비(亡失共匪)를 다룬 작품이다.
망실공비란 말 그대로 사망이나 체포가 확인되지 않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공비를 말한다.
1950년대 공비 토벌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전투경찰 송기열(최윤석)은 지리산 토벌전을 통해 유명한 빨치산 우두머리인 짝코(김희라)를 체포한다.
그러나 송기열은 짝코의 술수에 빠져 놓친 뒤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가정과 직업도 버린 채 수십 년간 짝코를 추적한다.
우여곡절 끝에 행려병자들을 수용하는 갱생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때부터 다시 탈출을 꿈꾼다.
송기열은 과거의 상관들에게 짝코를 데려가 명예를 되찾는 것이 목표였고, 짝코는 이제 그만 끝없는 도망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작용했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빨치산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뤘다.
반공이 국시인 군사정권 아래서 악마와 동급인 빨갱이를 인간적으로 묘사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극 중 짝코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오래전 연모했던 연인을 그리워하며 고뇌에 찬 삶을 사는 존재로 묘사했다.
반면 전투경찰인 송기열은 일시적으로 재물 욕심을 부렸다가 짝코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고 그때부터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잃는 파국을 맞는다.
통상적으로 빨갱이는 잔인무도한 악당, 반공투사들은 정의롭고 선한 존재로만 묘사하던 당시 반공 영화들하고는 여러모로 결이 다르다.
그만큼 임 감독이 전형적인 이념 논리에 빠져 상투적으로 인물 묘사를 하지 않고 다각도로 인물 분석을 통해 진정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다.
이를 통해 임 감독은 수십 년을 이어온 남북 갈등과 이념 대립이 이 땅에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안긴 허무한 일이었는지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아마도 여기에는 비극적인 가족사에 지친 그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1980년 대종상에서 우수 반공 영화상을 받았으니 아이러니다.
아마 경찰 출신의 집요한 공비 추적에 방점을 둔 모양이다.
그런데 결말을 보면 임 감독의 메시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영화 막판 "망실공비를 잡았다"는 송기열의 외침을 듣고도 경찰들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행려병자로만 취급한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수십 년을 매달린 각자의 신념과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깨닫는다.
이를 반영하듯 나란히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한 사람은 천천히 스러지고 한 사람은 허무한 웃음을 날리는데, 참으로 허무와 비애가 진하게 묻어 나오는 명장면이다.
이런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도록 공들여 복원한 한국영상자료원의 노력이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1990년에 수집한 35미리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지난해 디지털 작업을 거쳐 2K 화질로 복원했다.
이를 토대로 블루레이 타이틀이 제작됐다.
1080p 풀 HD의 2.77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영상 복원이 꽤 잘 됐지만 오래전 작품이어서 화질에 한계가 있다.
일단 수많은 필름 손상 흔적과 잡티 등 필름 노이즈는 깨끗하게 제거돼 보는데 불편이 없다.
일부 장면에서 미약하게나마 세로 줄무늬가 보이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해상도가 좋지 않아 어두운 장면에서 암부가 전혀 살아나지 않으며 디테일 또한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높이 평가할 만한 화질이다.
참고로 이 작품은 2월 7일 독일에서 개막하는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클래식 부문 상영작으로 결정됐다.
베를린영화제에서는 블루레이에 수록된 영상에 추가 색보정을 거친 판본이 상영될 예정이다.
음향은 LPCM 모노를 지원한다.
부록으로 디지털 복원 전후 비교와 3편의 음성해설이 들어 있다.
음성해설은 한글자막이 포함된 김대승 감독과 주성철 씨네21 편집장 해설, 임권택 감독과 허문영 평론가 해설, 시나리오를 쓴 송길한 작가와 김홍준 한국영상원 교수의 해설 등이다.
한글 자막이 들어간 음성해설은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 아주 유용하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갱생원 외부는 실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갱생원에서 촬영.
임 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실제 갱생원을 둘러본 뒤 내부를 세트로 만들어 촬영.
한국의 아랑 들롱으로 불렸던 최윤석이 노인 분장을 하고 전투 경찰 역을, 김희라가 짝코 역을 연기했다.
원래 이 작품은 소설가 김중희가 현대문학에 게재한 2페이지짜리 단편을 송길한 작가가 시나리오로 각색하며 많은 이야기를 추가했다. 임 감독도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밤에 형형하게 인광이 빛나는 장면은 안경에 수은을 발라 빛을 반사시켜 찍었다고 한다.
거울 뒷면에 발라놓은 수은 가루를 긁어서 독극물로 사용하는 설정은 당시 유산을 원하는 여성들이 속설을 믿고 사용한 방법이다.
송기열의 고향을 법성포로 설정. 삼영필름은 당시 외화 수입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이 영화를 제작했다.
시나리오를 쓴 송길한은 '씨받이' '길소뜸' 등 임 감독과 여러 영화를 함께 했으며 1970년대 극장판 만화영화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를 각색했다. 영화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이 동생이다.
1980년대 많이 돌아다닌 브리샤 택시.
임 감독은 이 작품을 '깃발없는 기수'와 함께 한쌍으로 여긴다.
여관 주인 역할은 2017년 타계한 김지영이 연기.
옛날에는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벽에 구멍을 뚫어 전등을 달아놓은 여관들이 많았다. 특히 군부대 근처 허름한 여관들이 저런 방식이었다.
임 감독은 "송기열의 아내 역할을 잘못된 캐스팅"이라고 했다. "정절을 지키는 조선 여인의 외모가 필요한데 그런 느낌이 잘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여배우에게 미안하고 송기열의 회상 장면의 감정 밀도가 많이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방희가 여자 빨치산 점순 역할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5분가량의 TV 토론 장면이 검열에서 잘려 나갔다. 출연자가 한국전쟁을 강대국의 이권 싸움에 희생된 한반도의 비극으로 표현하면서 북괴 도발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어머니를 찾은 짝코를 송기열이 습격하는 장면은 컷이 튀어서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필름이 손실된 게 아닌가 싶다. 일부 장면은 오디오도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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