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윤여정 15

하하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그렇듯 허허롭다. 영화 중간 어디서나 끊어도 이야기 전개에 지장이 없는 내러티브는 도대체 스토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린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받은 '하하하'도 마찬가지. 캐나다로 떠나기 앞서 선배와 등산을 간 주인공이 청계산 중턱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영화는 주거니 받거니 건네는 술잔처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오가며 진행된다. 화자의 관점은 둘이지만, 사실 그 둘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같은 내용이다. 공교롭게 같은 기간 통영에 머문 두 사람은 서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같은 주변인물들을 공유하며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것. 그렇게 같은 사건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것 또한 세상살이의 묘미요, 다양성의 ..

영화 2010.06.13

임상수 감독의 '하녀'

고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품 '하녀'는 영화 애호가들이 명작으로 꼽는 영화다. 특히 작가주의 감독들 사이에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다. 그런 만큼 리메이크를 할 경우 철저한 연구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년)는 원작에 대한 부담이 컸던지, 이상하게 뒤바꾼 설정 때문에 연구와 고민의 흔적이 묻혀 버렸다. 우선 임 감독은 원작에서 벌어지는 생존의 문제들을 욕정의 싸움으로 바꿔 놓았다. 다같이 배고팠던 60년대에 여공이나 하녀라는 직업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원작의 어린 여성들도 밥을 먹기 위해 여공이나 하녀가 됐고, 그렇다보니 갇힌 세상 안에서 순수한 사랑에 눈을 뜬다. 60년대 여성들의 사랑은 한 번 바친 순정이 곧 목숨이었다. 그래서 돈의 문제를 떠나 첫 ..

영화 2010.05.17

여배우들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2009년)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보는 토크쇼 같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등 유명 여배우들 6명이 한꺼번에 출연하는 흔치 않은 영화이기에 호기심을 갖고 봤으나 어찌나 카메라를 흔들어 대는 지 멀미가 날 지경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여배우들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과도한 들고 찍기를 한 탓이다. 하지만 이는 감독의 자가당착일 뿐이다. 카메라용 모니터나 편집실의 작은 모니터로 보면 들고 찍기 화면이 그럴 듯 해 보일 지 모르지만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키워 놓으면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탄 것처럼 화면이 춤을 춘다.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바짝 당겨 찍은 화면이 어찌나 심하게 일렁이는 지, '태극기 휘날리며'의 초반 장면을 보..

영화 2009.12.12

가루지기

판소리 여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가루지기 타령의 주인공 변강쇠는 단짝 옹녀와 함께 천하 제일의 정력남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신화적인 성적 능력은 숱한 문학 작품과 만화, 영화 등에 소재로 쓰였다. 신한솔 감독의 '가루지기'(2008년)도 숱한 변강쇠 시리즈 중 하나다. 다만 뮤지컬 요소를 도입하고 에로 영화와 만화 장면의 패러디를 통해 기존 작품들과 색다른 웃음을 시도했다. 영화에는 온갖 색적인 요소는 다 들어가 있다. 태양까지 치솟는 오줌발, 거시기로 제기 차기, 강쇠의 형 이야기를 끌어들이며 위험한 근친 상간 흉내도 내고 신화를 빙자한 수간까지 끼워 넣었다. 이야기 뿐만 아니라 형식도 파격적이다. 시대를 가늠하기 힘든 여인네들의 노출 심한 복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Y담을 읊을 기세다. 여기에..

꽃피는 봄이 오면

류장하 감독의 데뷔작 '꽃피는 봄이 오면'(2004년)은 TV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늘려놓은 느낌이다. 실제로 영화는 '인간극장'에서 방송한 관악부 교사 이야기와 폐광촌 아이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섞어서 만들었다. 내용은 일과 사랑에 실패한 트럼펫 연주자(최민식)가 쫓기듯 강원도 탄광촌 중학교의 관악부 임시교사를 맡으면서 다시 희망을 되찾는 이야기다. 선 굵은 연기를 주로 한 최민식이 교사로 나와 서민적이며 가슴 따뜻한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예전 TV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그가 맡았던 배역을 보는 것 같다. 허진호 감독 밑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조감독으로 일한 류감독답게 스타일이 허감독과 비슷하다.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을 집요하게 잡아내는 영상과 긴 호흡 등이 허감독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