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일본영화 10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사람들에게 내재된 공포와 불안감을 잘 표출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명성을 드높여준 '큐어'(1997년)도 마찬가지. 흔히 공포물로 분류되는 이 영화는 공포보다는 스릴러에 가깝다. 내용은 X자의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는 시체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연쇄 살인의 배후를 캐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는 특이하게 귀신이나 괴물이 아닌 평소 사람들이 드러내지 않는 복심, 즉 속마음으로 공포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최면술이 걸린 상태에서 은연 중 자신의 속마음에 따른 행동을 벌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속내가 결국은 공포의 원천이 된다. 기요시 감독은 이를 영상으로 잘 표현했다. 특이한 것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과 현실을 교차 편집해 보여주면서 등장인물들의 불..

러브레터 (블루레이)

국내 개봉전인 1997년, 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봤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년)는 사실 플롯이 정교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기본 골격은 산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남자친구와 이름이 똑같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남자친구가 과거 짝사랑했던 사연을 알게 되는 여인의 이야기다. 죽은 남자친구는 짝사랑했던 여인을 못잊어 똑같이 생긴 지금의 여자친구를 좋아한 것.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토록 좋아한 여인이라면 왜 한 번도 찾아가 고백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오히려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는 것 보다 서로 잘아는 사이인 여인을 찾아가 사랑을 얻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판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중학교 졸업앨범을 뒤져 찾아낸 주소로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을..

스윙걸즈 (블루레이)

수중발레를 하는 엉뚱한 남자 고교생들의 이야기인 '워터 보이즈'로 웃음을 터뜨렸던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스윙걸즈'(Swing Girls, 2004년)에서는 재즈 밴드를 결성한 여고생들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남학생이 한 명 끼어 있긴 하지만, 주축은 어디까지나 여고생들이다. 보충수업을 받기 싫어 핑계 김에 우연히 빅밴드를 결성한 여고생들이 밴드의 매력에 제대로 빠져 본격적인 재즈 밴드로 나서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실제로 배우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열성 끝에 출연자들이 직접 재즈를 연주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최상급 연주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만큼은 진솔하게 다가 온다. 여기에 감독은 고교생 특유의 발랄한 유머를 곁들여 '워터 보이즈'처럼 유쾌한..

피크닉

이와이 슌지 감독의 '피크닉'(1996년)은 '러브레터' '4월이야기' '하나와 엘리스' 등 순정만화처럼 곱디 고운 그의 작품들과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고 본다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이 작품은 어둠과 죽음, 상실의 비극이 혼재된 다크판타지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을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가슴 떨리는 사랑의 기억이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달아나고픈 소외의 충동이 있다. 그래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팬들은 전자를 '화이트 이와이'라고 부른다. '러브 레터' '4월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후자는 '검은 이와이'라고 부른다. '언두' '피크닉'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등이 여기 해당하며, 이 작품들이 2005년 한꺼번에 국내 개봉했다. 그 중 '피크..

우게츠 이야기

세계에 일본 영화를 알린 세 사람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를 꼽는다. 이중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일본 회화적 전통미를 잘 살린 감독으로 꼽힌다. 주로 억압된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그만의 유려한 카메라 테크닉으로 동양적 미를 잘 살렸다는게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이를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작이 바로 '우게츠 이야기'(1953년)다. 우에다 아키나리의 기담집에 실린 3편의 이야기를 묶은 이 작품은 일본 전국시대 도예공이 귀신과 놀아나는, 한마디로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른다는 우리네 속담같은 얘기다. 얼핏보면 별 것도 아닌 귀신영화일 수 있지만 서양인들은 이 작품에 홀딱 반했다. 앙드레 바쟁은 "리얼리즘의 극치"라고 평했고, 장 뤽 고다르는 이 작품 이후 미조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