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 Juliet, 1968년)을 소리로 먼저 들었다.
고교시절인 1980년대 초반, OST를 한참 모았는데 어느 날 FM에서 자주 틀어주던 주제가가 듣고 싶어 이 영화의 OST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음악으로 먼저 만난 작품
당시 오아시스에서 EMI라이선스로 내놓은 노란색 아웃 케이스가 있던 카세트테이프였다.
집에 와서 무심코 듣다가 '캐플릿가의 연회'라는 2번째 트랙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가 길게 이어진 뒤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말 그대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사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두 사람의 대사였다.
무도회에서 줄리엣을 처음 본 로미오가 기둥 뒤에 숨어 사랑을 고백하다가 "키스"라는 대사를 내뱉으면 줄리엣의 얕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어서 글렌 웨스톤이 부르는 'What is a Youth'라는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참으로 듣는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트랙이었다.
그때까지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 트랙을 몇 번씩 들으며 청순한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와 레오나드 화이팅(Leonard Whiting)이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면 여름밤이 그렇게 낭만적일 수 없었다.
그러다 몇 년 뒤 영화를 보게 됐는데 알고 봤더니 해당 장면은 어이없게도 손에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고 신음소리는 다른 곳을 쳐다보던 줄리엣이 놀라는 소리였다.
그 장면을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제피렐리의 연출력과 영상이 빛난 걸작
지금으로부터 무려 60년이 넘은 영화인데도 제피렐리 감독의 이 작품은 지금 봐도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결코 바즈 루어만이 치기 어린 리메이크로 따라올 수 없는 거장의 솜씨다.
원작이 워낙 유명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줄거리를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추리극처럼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새삼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특히 제피렐리 감독은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서 단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연극무대처럼 극적인 미장센느를 보여준다.
중앙의 인물을 향한 핀포인트 조명처럼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연극적인 조명이나 배경에 길게 드리운 휘장과 형형색색 의상들은 모든 장면을 연극 무대로 바꿔 놓았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이 읊는 연극 같은 방백 등을 보면 원작의 문학적 묘미를 최대한 잘 살렸다.
물론 제피렐리 감독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답답한 짓을 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중세시대 연극무대에서 구현하기 힘든 풍경들을 대사로 대신 전달했다.
영화에서는 한 컷의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 굳이 앵무새처럼 옮길 필요가 없는 대사들을 과감히 잘라냈다.
그 바람에 일부에서는 원전주의자들처럼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고 비판했으나 영화의 특성을 모르는 답답한 소리다.
오히려 제피렐리 감독은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원작의 묘미를 더한층 배가시켰다.
특히 이 작품의 백미인 어린 연인들이 발코니에서 안타까운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는 장면은 희곡만 봐서는 떠올리기 힘든 뛰어난 영상이다.
다채로운 춤과 의상, 음악으로 무도회의 흥을 시각화한 장면도 원작에 없는 영상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다.
더불어 무도회 장면은 두 연인이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하는 싱그러운 사랑의 설렘을 잘 표현했다.
여기에 제피렐리 감독은 베로나를 비롯해 이탈리아 곳곳을 찾아다니며 현지 촬영으로 중세 시대의 배경을 영상으로 잘 살렸다.
이 또한 연극무대의 한계를 시각적으로 크게 확장하며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한마디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돋보이게 만든 고풍스러운 멋이 배어있는 클래식 무비의 걸작이다.
영원한 줄리엣, 올리비아 핫세의 미모가 빛난 영화
이 영화가 이토록 빛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캐스팅이다.
제피렐리 감독은 원작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신인들을 과감하게 주연으로 발탁했다.
줄리엣을 연기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올리비아 핫세는 출연 당시 만 15세, 영국의 레오나드 화이팅은 만 16세였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보면 줄리엣은 만 14세가 채 되지 않았고 로미오는 그보다 조금 많다고 돼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올리비아 핫세는 줄리엣의 현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청순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를 발했다.
영화 내내 핫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그 혼자 별처럼 빛났다.
수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발코니 장면이나 무도회 장면을 보면 워낙 핫세가 청초하게 빛나다 보니 레오나드 화이팅이 결코 외모가 빠지는 배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배경처럼 묻혔다.
핫세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영원히 빛나는 배우가 된 최고의 줄리엣이다.
물론 핫세는 이후에도 '나자렛 예수' '썸머타임 킬러'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이 작품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레오나드 화이팅은 이후 작품들이 거론조차 되지 않을 만큼 성과가 없다.
그런 점에서 두 배우에게 이 작품은 생애 최고의 작품이면서 이름을 떨친 마지막 작품이 돼버렸다.
걸작의 안타까운 역설이다.
무난한 화질의 블루레이
아울러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니노 로타(Nino Rota)의 훌륭한 음악이다.
'대부' 시리즈와 '8과 2분의 1' '달콤한 인생' '태양은 가득히' '길' 등 뛰어난 작품들에서 훌륭한 음악을 선보인 그는 이 작품에서도 유명한 주제가를 비롯해 비장함이 감도는 음악들을 작곡해 안타까운 사랑의 비극을 강조했다.
끝으로 다닐로 도나티의 의상도 이 작품을 빛낸 숨은 공신이다.
남자들의 발레복 같은 쫄쫄이 패션부터 여성들의 드레스까지 각종 의상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면서 영상을 화려하게 바꿔 놓았다.
덕분에 다닐로 도나티는 이 작품으로 제41회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았다.
이번에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한다.
오래전 작품인 만큼 아무래도 요즘 영화 같은 화질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DVD 타이틀에 비하면 월등 좋지만 요즘 영화와 비교하면 좋은 화질이 아니다.
필름의 입자감이 두드러지고 샤프니스가 높지 않아 윤곽선이 두껍게 보인다.
중경과 원경의 디테일이 떨어지며 여러 장면에서 플리커링과 잡티, 지글거림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색감이 자연스럽게 잘 살아있어 다행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제작 연도를 감안했을 때 무난한 화질이다.
DTS HD MA 2.0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역시 서라운드 효과를 거의 느끼기 힘들다.
사운드가 전방에 집중된 편.
부록이 전무해 아쉽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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