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누군가에게 기쁨일 수 있고 누군가에는 슬픔이나 잔인한 추억일 수 있다.
대만(Taiwan)의 이안(Ang Lee) 감독은 '음식남녀'(飮食男女, Eat Drink Man Woman, 1994년)에서 요리를 통해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인생을 그렸다.
호텔 주방장을 지내며 오래도록 요리를 한 주 선생(랑웅)은 매주 한 번씩 홀로 키운 세 딸들을 위해 성대한 저녁을 차린다.
그에게는 근사한 만찬을 준비하는 것이 나름 가족의 유대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저녁 자리가 즐겁지는 않다.
의례히 치르는 통과의례처럼 세 딸과 아버지는 저녁자리에 함께 앉지만 그다지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가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매주 한 번의 만찬을 고집한다.
다 자란 세 딸들은 둥지를 떠나는 새들처럼 각자의 독립된 삶을 꿈꾼다.
대학생인 막내딸(왕유문)은 저녁 자리에서 느닷없이 임신 사실을 알려 가족들을 까무러치게 한 뒤 어린 신랑과 살림을 차려 나간다.
고교 선생인 첫째 딸(양귀매, Yang Kuei Mei)은 가족과 상의 한 번 없이 혼인신고를 한 뒤 남편을 데려와 아버지를 놀라게 한다.
야무진 둘째 딸(오천련, Wu Chien Lien)은 항공사에서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전재산을 사기 분양에 투자했다가 다 날린다.
둘째 딸은 결혼보다 적당히 남자들을 만나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세 딸의 변화를 지켜보며 아버지는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절감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전통과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그런 변화를 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막판 반전은 포복절도할 만큼 유쾌하고 즐겁다.
어찌 보면 예상 가능한 일이면서 허를 찌르는 반전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안 감독은 이런 변화를 요리를 통해 표현한다.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과 호텔에 급파돼 일을 돕는 모습, 그리고 친구 딸(실비아 창, Sylvia Chang)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묘사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딸들의 모습도 요리 속에 녹아들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막내딸은 인스턴트 음식처럼 벼락 치듯 그의 삶에 변화를 맞는다.
가장 아버지를 닮은 둘째 딸은 요리를 좋아하지만 주방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는 아버지 때문에 요리 솜씨를 정작 집에서 발휘하지 못하고 남자 친구 집에서 뽐낸다.
그는 남자 친구에게 요리를 해주면서 또 다른 기쁨과 삶의 보람을 찾는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요리를 허락하는 것은 단순히 사고의 변화가 아닌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세대 변화를 받아들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둘째 딸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어릴 적부터 살았던 오래된 집을 물려받아 가족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가장 자유분방한 삶을 살 것 같던 둘째 딸이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한다 해도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소소한 유머와 생각할 거리를 함께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이안식 블랙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동안 무명으로 지내며 힘든 시기를 보낸 이안 감독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할리우드(Hollywood)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대만 아버지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다.
그만큼 가벼운 소품처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이면서 대만인의 삶, 정확히 말하면 대만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의 삶을 이채롭게 녹여낸 영화다.
'헐크'(Hulk)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등 할리우드 영화로 이안 감독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만인으로서 살았던 삶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웰메이드 영화인 '와호장룡'(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이나 '색계'(Lust, Caution)와도 결이 다르다.
유명세를 얻은 이후에 만든 화려한 작품들과 달리 이안 감독의 본바탕을 확인할 수 있는 수수하지만 진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적극 추천한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이 작품의 블루레이(Blu-ray) 타이틀은 무난한 화질이다.
일단 윤곽선이 두텁고 예리하지 않으며 간간히 플리커링도 보여 아주 좋은 화질이라고 하기 힘들다.
DTS HD MA 2.0을 지원하는 음향은 대사 음량이 작은 편이어서 아쉽다.
부록으로 감독 인터뷰가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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