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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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정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년)은 사람의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똑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벌이는 미묘한 로맨스를 약간 어수선하게 풀었지만 나름대로 색다른 시도가 좋았다. 이 작품을 보면 홍 감독의 연출이 겉보기에 심드렁해 보여도 의외로 사람의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구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등장인물들의 마음속을 엑스레이로 촬영한 듯한 대사와 그림들을 보며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할리우드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다시 나온 DVD 타이틀은 화질이 개선됐다. 흑백 영화라는 특성상 화질이 개선돼도 큰 차이가 나지..

PG GAT-X105 스트라이크 건담

'스트라이크 건담' 애니메이션은 기대만큼 재미없었다. 캐릭터들도 정이 가지 않았고 선이 날카로운 기체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반다이에서 프라모델로 내놓은 '스트라이크 건담'은 놀랍도록 훌륭했다. 특히 내부의 이중 관절 구조를 완벽하게 구현한 덕분에 퍼펙트 그레이드(PG)라는 등급에 걸맞게 상상을 초월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관절의 움직임은 사람에 가깝고 외형은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것이 이번 PG 스트라이크 건담의 특징이다. 일단 머리가 기형적으로 작고 다리가 비례에 안 맞게 길어 만화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다. 건담 오리지널이나 제피랜더스에 비하면 머리가 20~30% 작은 편. 반면 부품 수가 적고 딱딱 들어맞아서 만들기는 편하다. 유격도 별로 없어 마무리 손질도 거의 할 필요가 없다. ..

미인

여균동 감독의 '미인'(2000년)은 퍼포먼스 같은 작품이다. 누드 외에는 개성 있는 캐릭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야기도,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다. 그렇다 보니 카페처럼 꾸민 공간과 곱기만 한 영상, 그리고 벗은 몸만 부각될 뿐이다. 내용과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 채 배우들의 꿈틀거리는 몸부리만 남다 보니 결국 퍼포먼스가 되고 말았다. 누드모델인 여자(이지현)와 프리랜서 작가(오지호)가 사랑의 몸살을 앓는 이 작품은 감독의 단편 '몸'이 원작이다. 사랑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묘한 인간관계를 다룬 작품인 만큼 심리 묘사가 중요한데, 대사 처리도 제대로 못한 오지호와 이지현의 어설픈 연기는 오히려 작품을 많이 깎아내렸다. 그나마 간간이 나타나는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과 노영심의 단정한 음악이 돋보였..

여고괴담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1998년)은 우리 공포물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빼어난 수작이다. 감독이 직접 쓴 탄탄한 시나리오와 더불어 입시위주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메시지 전달력이 뛰어났다. 특히 공포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익숙한 이야기와 환경을 다뤘기 때문이다. 화장실 귀신처럼 오래된 학교에 한두 가지씩 떠도는 귀신 이야기와 학교라는 건물이 주는 위압감과 폐쇄감을 적절히 이용했다. 예전 두발 및 교복자율화 이전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유난히 을씨년스럽던 풍경이 떠오른다. 불 꺼진 어두침침한 나무 마룻바닥 복도, 바람에 연통이 흔들리며 끊임없이 울려대던 삐걱거리는 쇳소리, 한낮에도 그늘이 져 해가 들지 않는 외따로 떨어진 화장실 건물, 을씨년스러운 뒷산과 이어진 쓰레기소각장 등 ..

시월애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뜻의 '시월애'(2000년)는 영상이 참 아름다운 작품이다. 색을 중시하는 이현승 감독답게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장면들이 그림 같다. 내용은 집 앞에 세워놓은 우체통을 통해 1998년에 사는 남자 성현(이정재)과 2000년에 사는 여자 은주(전지현)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싹 틔우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뒤가 궁금해 끝까지 보게 만드는 줄거리도 완성도가 높고 물 위에 떠있는 섬처럼 표현된 집이 꿈같은 영상을 만들었다. 여기 출연한 이정재는 영화 속 집 이름인 '일 마레'에 반해 똑같은 이름의 카페를 만들었다. 그러나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아름다운 그림을 제대로 못 살렸다. 불과 5년 전 작품인데도 마치 50년 지난 작품처럼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