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2014/07 14

타락천사 (블루레이)

킬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랑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여인과 마지막 약속을 한다. 여인은 망부석처럼 앉아서 기다리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애잔한 노래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당신을 잊었어. 모든 것을 잊어버렸어. 살아갈 의미 조차 잊어 버린 채 나 자신도 잃어 버렸어...' 왕가위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영화 '타락천사'(1995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관숙이, 셜리 콴이 부르는 노래 '망기타'(忘記他)이다. '그를 잊었다'는 뜻의 제목이 말해주듯 이 노래는 가슴 시린 이별가이다. 영화 속에선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킬러인 여명이 파트너인 이가흔과 이별할 때, 또 한 번은 여명이 이가흔을 잊기 위해 거리에서 만난 막문위와..

반칙왕 (블루레이)

1970년대 흑백 TV 시절 최고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단연 프로레슬링이었다. 레슬링이 있는 날이면 집으로 뛰어들어와 책가방을 던져두고 TV 앞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김일, 여건부, 천규덕 등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의 이노키 선수는 최고의 악당이었다. 레슬링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일본에서 만든 '타이거마스크'라는 TV 만화영화도 들여와 방송했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2000년)은 과거 레슬링에 대한 향수가 어린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프로레슬링을 통해 현대인들의 꿈과 삶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웃음과 페이소스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은행원(송강호)이 어느 날 우연히 레슬링 도장을 발견하고 어린 시절 우상..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블루레이)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비주얼을 위해 이야기가 존재하는 영화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영상들이 마치 양과자점에 벌려 놓은 예쁜 컵케이크처럼 반짝 반짝 빛난다. 그만큼 색깔이 예쁘다. 하지만 타셈 싱 감독의 '더 폴'처럼 장대하고 감동적인 비주얼은 아니고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비주얼이다. 여기에 잘 꾸며진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정돈된 미장센 또한 돋보인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도외시한 채 비주얼만 신경 쓴 것은 아니다. 여귀족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을 약간은 코믹한 추리소설처럼 펼쳐 놓았다. 즉, 적당한 가벼움을 가미해 비주얼을 살리면서 이야기를 끌어간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마치 엽기적인 작품을 잘 만드는 팀 버튼의 팬시 버전처럼 지나친 무거움과 어두움을 살짝..

러시 더 라이벌 (블루레이)

론 하워드 감독의 '러시 더 라이벌'(Rush, 2013년)은 보지 않고 지나쳤더라면 후회했을 만한 작품이다. 실화를 토대로 만든 자동차 경주의 두 라이벌이 어떻게 경쟁을 벌이고 우정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지를 흡입력있게 풀어 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F1 자동차 경주에서 맞수이자 친구였던 제임스 헌트와 토니 라우다의 1976년 챔피언십을 놓고 벌이는 대결을 다뤘다. 물론 극적 재미를 위해 실제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좀 더 긴장감있게 과장한 측면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무덤덤한 작품이 아니라 박력넘치는 자동차 경주의 사실적 요소를 살리면서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드라마를 강조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모두 성공했다. 확실히 론 하워드 감독은 '분노의 역류'에..

크래쉬 (블루레이, 감독판)

공포물이 주는 두려움은 미지의 존재, 즉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와 다른 형태, 움직임, 소리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몰라서 방어기제처럼 공포가 작동해 경보를 울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종 차별도 공포물이나 다름없다. 모르는 것을 무서워하는 공포물처럼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배어 있다. 폴 히기스 감독의 '크래쉬'(Crash, 2004년)는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인종 차별 문제를 공포영화처럼 섬뜩하게 다뤘다.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사건들이 결국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만들고, 이를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제작 및 연출, 원안에 공동 각본까지 쓴 폴 히기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미국 사회가 오랜 세월 인종..